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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아 Jul 09. 2024

채소 씻는 기계가 나올 때도 됐는데

아이고, 팔, 다리, 허리, 어깨야


나에게 있어 채소를 씻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 중에 하나이다.

호박이나 오이, 당근, 가지, 양파를 말하는 게 아니다. 그것들은 채소계의 양반이다. 그저 물에 담가 어루만지듯 문질문질 씻어주면 끝이니까. 마늘 그 자잘한 것들까지도 양반의 범주에 넣어줄 수 있다. 그래, 거기까진 괜찮다.


문제는 상추나 깻잎, 쑥갓과 같은 쌈채소들이다. 이런 쌈채소는 씻어도 씻어도 어디에 붙어 있었는지 금방 씻은 물 밑에 흙이 조금씩 남는다. 분명 세척 끝~!이라 외치기 직전이었는데 늘 몇 알 남은 흙 때문에 찜찜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상추보다 더 심한 건 시금치나 달래, 냉이 같은 장차 나물 반찬이 될 채소들이다. 이것들은 마치 나와 맞짱을 뜨겠다는 포스를 내뿜는다. 어디에 꼭꼭 숨겨둔 건지 물을 몇 번을 갈아 씻고 또 씻어도 흙을 뱉어내고 뱉고 또 뱉어낸다. 아, 뻘밭에 있던 조개 캐온 줄. 허리도 아프고 목도 뻐근하고 다리도 퉁퉁 부어올라 짜증이 슬 솟구친다.  


며칠 전 어머님께서 텃밭에서 수확한 채소가 많다며 가져가라고 연락을 주셨고, 남편은 어머님이 주시는 그대로 군말 없이 받아온 채소가 거실에 작은 산을 이루었다. 그중 눈에 띄는 건 부추 보따리였는데 말 그대로 한 보따리였다. 밭에서 따서 바로 주신 거니 대부분 싱싱한 초록빛이겠거니 하고 싱크대 개수대에 전부다 와장창 들이부었는데 이런... 누런 꽁지들이 중간중간 섞여 있다. 꼼꼼히 확인하지 않은 내 불찰이다. 그래도 양이 적었면 솎아 내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텐데 어마어마한 양 때문에 히익! 하고 놀란 마음의 소리가 튀어나왔다. 물에 담그지나 않았다마른 상태에서 다듬으니 한결 수월했을 텐데 이미 엎질러진 물, 아니 이미 물에 풍덩 빠진 부추다. 물속에서 서로 붙어있는 것들을 떼어내며 씻으려 하니 시간은 곱절로 걸린다. 정말 환. 장. 할. 노. 릇.이다.


다듬으며 씻고, 물을 쫄쫄쫄 흘려가며 씻고, 누런 꽁지 뜯어가며 씻고, 푸른 잎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 누런 이파리 떼어가며 씻고, 헹궈내고 또 헹궈도 이런 젠장,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 부추. 부추대전쟁이다. 아... 겨울 되면 즐겨 신던 부츠도 싫어지려 한다.


결국 씻다 씻다 온몸이 뻐근해져 미쳐버릴 것 같은 나는, 괴로움도 즐거움도 늘 함께 하기로 맹세했던 나의 반쪽은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나 눈을 돌려 찾아보았다. 거실에서 유튜브를 열어 긴 영상, 짧은 영상 골라가며 크득크득 웃으며 한가한 시간을 만끽 중이네? 오후 늦게 출근하는 날이라 여유만만인 남편에게 SOS를 쳤다.


"여보. 나 이거 씻다가 돌아버릴 것 같아. 먼저 다듬고 나서 물에 부었어야 했는데 어지간히 다듬어져 있는 건 줄 알고 그냥 물에 부었더니 으... 난리 났어, 이거. 와 속이 뒤집어지네. 안 끝나 도대체가."


부추지옥에 빠진 나는 거짓말 조금 보태 울먹거리며 이제 곧 닭똥 같은 눈물을 쏟을 듯한 죽상을 하고 애처롭게 말했다.


채소 씻다 죽었다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설사 씻다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다 해낼 수 있기는 하다. 스무 살 즈음 설날에 언니와 단 둘이서 만두피도 직접, 만두소도 직접 만들어 밤을 새워가며 100개가 훌쩍 넘는 만두를 빚은 적도 있는 화려한 전적 보유자라 까짓 두어 시간 씻으면 되지 싶었다. 별 거 있나. 깔끔한 부추와 곧 부러질 듯한 목을 맞바꾸면 될 일. 하지만 어머님이 주시는 대로 이것도 네, 저것도 네, 넙죽넙죽 다 받아오면 안 된다는 걸 남편이 깨달았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던 거다.


받더라도 적당히 감당될 만큼만 받아와야지 주시는 대로 이것도 오케이, 저것도 오케이 다 받아오니 냉장고는 냉장고대로 미어터지고, 결국 다 먹지 못해 버리는 것은 버리는 대로 아깝고 해서, 대책 없이 너무 많이 가져오면 처치곤란이라는 걸 몸소 느꼈으면 해서 '당신도 좀 해 보슈' 하고 일부러 시킨 마음이 7할쯤 되었다.


남편은 이런 나의 속셈은 모른 채 울상을 한 내가 안쓰러웠는지 바통을 넘겨받고는 싱크대 앞에 섰다. 그렇게 물을 졸졸졸 흘려가며 나보다 1.5배는 큰 손으로 가늘고 긴 부추들을 조물조물 만져가며 일일이 하나하나씩 다듬으며 씻어냈다. 그러기를 장장 한 시간이 지났을까. 남편이 손에 남은 물기를 터는 게 보인다.


"오~~ 드디어 끝난 거야?"


"응."


에고고 곡소리와 함께 내 옆에 앉아 잠시 쉬는가 했더니 벌떡 일어나 계란을 여남은 개 꺼내고 볼에 부추를 썰어 담는다. 부추전을 하려나 보다. 비 오는 소리를 닮은 지글지글 부침 소리가 들리더니 물이 한 방울도 들어가지 않는 바삭한 부추전을 몽땅 부쳐냈다. 와우. 이 양반 시집가도 되겠는 걸?






며칠 전에 직접 담근 양파 장아찌를 꺼내 부추전과 먹었더니 재래시장의 전매특허라 할 수 있는 녹두전도 부럽지 않았다. 도톰하지만 바삭한 전을 호호 불어 맛있게 먹고 남은 전은 차곡차곡 냉동실에 잘 보관해 두었다.


근데 슬쩍 싱크대를 보니 웬 걸? 푸릇하니 쓸만한 부추 한 두 주먹이 아직 물에 둥둥 떠 있다. "이건 뭐야? 버리는 거야?" 했더니 "응, 그건 그냥 버려. 그 정도는 안 먹어도 돼. 어휴. 못하겠어. 버려." 하하. 작전 성공이다. 본인도 힘들게 씻고 씻다가 더 이상은 못 서 있겠다 싶었나 보다.




과자처럼 바삭하고 고소한 부추전을 실컷 먹었다.

한데 음식은 혼자 다 했으면서 대뜸 나에게 "잘 먹었습니다." 하는 남편.


의아하고 미안함에 솔직하게 물었다.


"난 아무것도 안 했는데 왜 나한테 잘 먹었대?"

혹시 게으른 날 비꼬는 건 아닌가 싶어 10대 소녀도 아니면서 내 볼은 민망함에 발그레해지려 했다.


그랬더니 하는 말이


"나 이제 곧 출근해야 하는데 그럼 자기가 이 뒷정리 다 해야 하잖아."


우와. 그리 깊은 뜻을 담아 말할 줄은.

워낙 주방일은 안주인의 일로 받아들이는 게 일반적이고 따라서 당연히 내가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하고 있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인식이 밑바탕되어 나오는 남편의 말이라 신선했다. 게다가 마누라의 영역이라고 당연시 여기며 굳이 미안해하지 않아도 될 터인데 자신이 깔끔하게 마무리를 하지 못한 미안함을 콕 집어 말로 표현해 주니 참 고마운 마음이 든다.


진심을 담은 말을 들으니, 다른 때 같았으면 "정리해 가며 요리해야지, 6.25 난리도 이 정도는 아니겠다. 이 난장판 어쩔 거야? 이렇게 요리할 거면 요리 그까짓 거 개나 소나 다하겠다!" 하는 잔소리를 한 바가지 했을 텐데 예쁜 말 한마디에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주방을 보고도 나는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말 한마디에 천 냥 빚 갚는다"는 말은 어릴 적에 수도 없이 들었던 속담이었지만 어른이 되면서 이 말은 왠지 모르게 자꾸 불편하고 반감이 일었다. 천 냥을 빌려갔으면 도로 천 냥을 가져와 그대로 갚아야지 아니, 그동안 빌린 날수 감안해서 이자까지 얹어 갚아야지 어디 말 한마디로 퉁을 치려 하는 거야? 어림 반푼어치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직접 겪어 보니 천냥 빚 갚는 게 가능할 수도 있겠구나 싶어진다. (전부 다는 무리고 조금 깎아주는 정도?)


그나저나 AI가 별의별 일도 다 하는 요즘인데 채소 씻는 기계는 어디 안 나오나?

이제 나올 때도 됐는데.



어휴. 좋긴 한데 이건 너무 크네.




*이미지 출처. 네이버포스트, 픽사베이, 유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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