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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아 Jul 16. 2024

주부가 도둑이 되는 이유

좀도둑 해방의 날을 고대하며


나는 도둑이 아니다.

하지만 늘 호주머니를 뒤진다.

도둑이 아닌데도 호주머니를 자꾸 뒤지다 보니 꼭 도둑이 된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거의 드물지만 가끔 호주머니에 돈이 있으면 실제로 내 주머니로 옮기기도 한다. 아, 그럼 도둑이 맞긴 맞는구나. 하지만 그건 돈을 자연스럽게 내 주머니로 옮기게 만든 원인 제공자에게도 잘못은 있다. 이쯤 되면 눈치를 채신 분이 있을 것 같다. 그렇다. 나는 지금 빨래바구니 앞에 서 있다. 더 자세히 말하면 빨래바구니를 세탁기 앞에 두고 옷을 하나 들어 이리 돌리고 또 하나 들어 저리 돌리며 호주머니를 뒤지는 중이다.



세탁기가 일을 다 마치면 옷들을 뭉텅이로 잡아 바로 옆 빨래건조기에 집어넣는다. 늘 하는 일이므로 머리는 딴생각을 해도 두 손은 스스로 알아서 옷을 옮긴다. 두 시간쯤 지나고 건조기도 제 할 일이 다 끝났다며 발랄하게 노래 부르면 행여 열기에 옷이 쪼그라들까 봐 얼른 건조기로 달려간다. 후끈해진 옷을 두 손으로 모아 잡아 꺼내다 보면 도대체 이런 게 같이 바짝 말린 걸까 싶은 게 따라 나온다. 사탕을 쌌던 포장 껍질(끈적한 알맹이는 없어 다행이다), 수첩에서 한 장 뜯어내 끄적였던 종이조각, (요건 좀 마음에 드는) 지폐, 심지어 말도 안 되는 볼펜도 나온다.


지폐나 동전인 경우는 조용히 내 주머니로 가져가며 아싸, 득템!이라 외치면 되지만 다른 것들은 대부분 난감하다. 형체를 알 수 없게 쭈그러진 종이 조각은 그나마 다행이라 해야 할까. 휴지 한 장이 같이 돌아가 검은 옷에 희끄무레한 점꽃들이 무수히 피어난 걸 보고 있자면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뭐 그건 돌돌이를 조금 많이 희생시켜 몇 번 돌돌거리면 해결할 수 있으니 한숨과 함께 넘길 수 있다. 가장 참을 수 없는 건 볼펜이었는데 주머니에 그대로 박혀 나오는 경우에는 잉크가 주머니를 모두 검게 물들여 그 옷은 못 쓰게 되어버렸다.  



주부라면 빨랫감을 세탁기에 넣기 전에 주머니를 뒤져보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하는 건 당연한 게 아니냐 할 수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단, 옷을 한 두 개 빠는 게 아니니 문제다. 시간이 걸려도 너무 걸린다.


그래서 나는 선언했다.


다시는 빨랫감 호주머니에 내 손을 집어넣지 않겠노라고. 

물건 따위 주머니에 있든지 없든지 확인하는 일은 앞으로 내 남은 생에 일절 없을 거라고.


듣기에 따라 좀 매정하다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가 않다.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 옷을 벗기 전에 두 손 편케 넣을 수 있는 위치에 자리한 호주머니에 손을 쓰윽 집어넣어 뭐가 들어있는지 확인하는 건 일도 아니지만, 아무 확인도 않고 뱀이 허물 벗듯 옷을 벗어젖혀 빨래통에 던져 넣는 경우엔 얘기가 달라진다. 빨래통 안에 널브러진 옷들을 주부가 일일이 하나씩 주워 들어 주머니가 여기 있는지 저기 있는지 옷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주머니 찾는 것부터가 일이 되기 때문이다. 주머니를 찾았다고 끝이 아니다. 축 늘어진 매가리 없는 옷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하나하나 뒤지는 게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다.


옷을 한 번에 하나씩만 빨면 몰라도 꽤 많은 양을 모아 한꺼번에 빠는 경우가 많은데 옷 하나당 2개의 주머니가 있다고 가정하고 약 15개를 빤다고 하면 무려 30개의 주머니를 뒤져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아이고, 아부지...


그러니 호주머니를 더 이상 뒤지지 않겠노라 선언하는 건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못 되게 구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다. 가족들이 빨래하는 사람을 배려하지 않고 오래 서 있기 고문을 가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나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호주머니 안에서 볼펜이 나오든 매직이 나오든,

그래서 옷 꼴이 거지 꼴이 되든

주머니를 뒤지지 않겠노라 선언한 것이다.


선언한다고 바로 개선되면 신이지, 인간이 아니다.

바로 나아질 리 없다.


노래를 부를 시간이다.

남편이든 아이들이든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보며 "이제 더 이상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뒤지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주머니 안에 있는 물건 때문에 옷이 망가져도 나는 몰라."


처음에는 일일이 이야기하기 버겁기도 하고 말하기 귀찮으니 내가 해버리고 말지 싶기도 하지만 인내를 가지고 노래를 부르고 또 부르면 노래는 점점 짧아질 수 있다.


첫째 날은

"호주머니 안 뒤진다고 했지? 주머니 다 확인한 거야? 옷 망가져서 옷 사야 하면 각자 통장에 있는 돈 내가 꺼내서 옷 사준다~"


둘째 날은

"호주머니 다 확인한 거지? 주머니에 뭐 있어서 옷 망가지면 나는 몰라. 각자 책임이다~"


셋째 날은

"호주머니 확인 모두 다 끝내고 넣은 거지?"


넷째 날은

"걍(그냥) 빤다~"


다섯째 날은

"......"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냥 빨래를 시작한다)



그렇게 자꾸 반복하여 말도 해주고 노래도 불러줌으로써 습관을 만들어 주면, 나중엔 굳이 떠올리려 노력하지 않아도 몸이 기억해 자동으로 호주머니를 만지작만지작하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물론 이게 맞나 싶을 때도 있다.

우려한 대로 옷이 못 쓸 정도로 망가지는 경우도 생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를 낼 필요는 없다. 망가진 옷을 옷 주인에게 직접 보여줌으로써 강한 충격으로 경각심을 주는 효과가 있으니 일종의 비용인 셈이다. 그리고 옆 집 아줌마로 빙의하여 나와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건조한 표정과 목소리로 "난 몰라. 확인 안 한 네 책임이야."라고 한번 더 쐐기를 박아 주면 된다.


그럼 자신이 아껴 모으고 모은 돈이 애먼 옷 구입비로 쓰이는 일이 없길 바라는 마음에 옷을 벗을 때마다 열심히 호주머니를 확인한 후에 빨래통에 넣게 된다. 잔소리를 하지 않아도 되는 그날이 오게 되는 것이다.


안주인, 바깥주인 칭하듯 집 밖에 나가서는 아빠가 왕, 집안에서는 엄마가 왕으로 살면 가정이 두루 편안하다는 말이 있다. 보통, 힘으로 밀어붙이면 집 밖이든 안이든 아빠는 늘 엄마를 이길 수 있겠지만 집안에서는 엄마를 여왕 대하듯 떠받들어 준다면 희한하게 집안일이 술술 잘 풀리는데 그건 곧 삶의 지혜라 할 수 있다. 집 안에서 가사로 지친 엄마의 표정이 어두우면 아이들과 남편에게도 그 기분은 전염되고 만다. 고로 엄마가 스트레스받지 않고 행복해야 온 집안이 행복해진다.




내가 결혼하기 전, 갓 결혼한 언니 부부와 함께 차로 이동하던 중.

뒷좌석에 홀로 앉은 나는 앞 좌석에 앉은 언니와 형부의 말다툼을 가만히 듣게 되었다. 평소 사이가 참 좋은 부부였기에 예상을 못 한 상황이라 당황했다. 대화 초반에는 "분명 우린 싸우는 게 아니라 대화하는 거야~" 하며 장난처럼 하는 대화라고 나를 안심시켰지만 언성은 점점 커졌고 둘의 대화에 감히 낄 수 없어 잠자코 듣고 있어야 했던 나는 얼마나 불편했는지 모른다. 할 수만 있다면 속도가 조금 늦춰졌을 때 이 차에서 뛰어내릴까도 생각했다.


이촌 지간인데도 마음이 이리 불편한데 매우 사소한 일(호주머니 확인을 왜 하지 않았느냐, 빨래하는 김에 확인하면 될 일을 왜 트집을 잡느냐 하는 대화)로 얼굴을 붉히고 싸우게 된다면 같은 공간에 있는 자녀들은 얼마나 마음이 불안할까. 실제로 부부싸움을 목격하는 자녀들은 전쟁에 버금가는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하니 애초에 불화의 싹을 만들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



변화가 필요할 때가 있다.

변화만 된다면 모든 게 순조롭고 더없이 좋을 텐데 그저 엄마라는 이름의 무게에 눌려 혼자 끙끙거리며 모든 걸 안고 가는 경우가 있다. 엄마의 표정이 밝고 엄마가 건강해야 집안 식구들의 표정도 함께 밝아질 텐데 그 쉬운 걸 놓치게 되는 거다. 그냥 내가 하면 되지, 내가 해버리고 말지 하면, 함께 살면서 제일 가까운 식구인 가족은 엄마의 희생을 점점 당연하게 여기게 된다. 당연하게 여기기 시작하면서 동시에 감사한 마음도 사라진다.




며칠간 호주머니 송(song)을 지겹게 부른 덕분에 시작하기도 전에 한숨부터 나오던 빨래하는 시간이 이제는 즐겁다.


나는 이제 더 이상 호주머니 송(song)을 부르지 않는다.

주머니도 당연히 뒤지지 않는다.

빨랫감을 뒤적일 필요 없이 홀가분한 마음으로 빨래를 시작할 때면 잘 부르지 못하는 휘파람까지 절로 나온다.



 

앞으로 호주머니를 뒤질 일 없는 주부의 홀가분한 심정은 한 요정도?




*이미지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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