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루시아 Sep 25. 2024

컵라면 용기를 바꿀 용기

스티로폼이든 종이든 바꿔 봅시다




라면은 맛있다.

얼마나 맛있냐면 91세 할아버지가 41년간 삼시세끼 라면만 먹고살았다고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할 정도로 맛있다. 이 분의 건강을 염려한 의사가 "할아버지~ 건강 생각해서 이제 라면은 그만 드시는 게 좋겠어요." 했는데 그 말을 한 의사가 할아버지보다 먼저 명을 달리 했다는 이야기는 라면을 다시 보게 만든다. 


어쨌든 라면은 맛있다.

그러니 집에서 정성 들여 만든 엄마표 요리를 코 앞에 두고 "엄마~ 라면 먹으면 안 돼요?" 하고 아이들이 입을 모아 합창을 하는 거겠지. 봉지라면도 맛있는데 면발이 훨씬 얇고 더욱 쫄깃한 식감의 컵라면은 두말하면 입이 아프다.


라면의 여러 요소들이 건강에 좋지 않다는 걸 여실히 아는 나조차 가끔은 한밤중에 라면이 당겨 내일 아침 얼굴이 퉁퉁 부어도 내 알 바 아님을 시전 하며 야무지게 한 사발 끓여 먹는데 몸 건강을 신경 쓰기엔 세포가 이제 막 푸릇푸릇하게 생성되기 시작한 어린아이들이야 더 말해 무엇할까. 믿을 구석이 있어서인지 요것들은 계속 라면 먹고 싶다고 노래를 부른다.


그래 까짓 봉지라면은 아흔이 넘은 할아버지가 주야장천 드셔도 장수하는데 전혀 문제없으셨다는데 하면서 가끔 끓여주긴 한다만 허용 범위는 딱 거기까지만이다. 컵라면은 어림도 없다. 하지만 한 번씩 생겨난(알라딘의 요술램프가 집에 있는 것도 아닌데 정말 신기한 일이다) 컵라면이 찬장에서 발각되는 날이면 아이들은 장화 신은 고양이의 눈을 해가지고는 제발 한 번만 먹자고 통사정을 한다. 아... 마음이 약해지는 순간이다. 공감 능력 스탯에 만렙을 찍고 태어난 이 어미는 아이들이 얼마나 먹고 싶어 하는지 그 마음을 절절히 알겠다. 하지만 컵라면의 스티로폼 용기는 마치 빌런이 무더기로 나오는 영화에서 피도 눈물도 없는 무지막지한 악당으로 변화돼 보이기 때문에 나는 한껏 근엄한 표정만 지어 보일 뿐 쉽사리 결정을 내릴 수가 없는 것이다. 



스티로폼 용기에 담긴 음식



대학 시절 묵찌빠를, 아니 생물학을 전공했다. 생물학에 큰 뜻이 있었다기보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렇듯 점수에 맞춰 갔다. 하지만 공부를 하면 할수록 고등학교 때 배웠던 것보다 좀 더 깊고 넓은 과학을 접할 수 있었다. 알고 나면 보인다고 좀 더 시야가 넓어지고 있구나 하고 뿌듯하다가도 때로는 모르는 것을 알게 됨으로써 불안감이 생겼다. 차라리 모르면 몰랐지 알고 나니 찝찝함만 더 커졌달까. 

전공 수업 실험 때마다 현미경을 끼고 살며 눈에 보이는 대로 나는 하나의 점찍는 기계가 되어 미대생도 아니면서 실험 관찰 노트에 점묘화를 한 점 한 점 완성시키는 시간을 꽤 오래 보냈었다. 그 때문일까. 



라면 용기에 뜨거운 물을 붓는다 해서 용기가 녹아내리지는 않는다. 아니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맞겠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용기가 녹아내리지 않는 게 아니라 우리 인간의 눈은 그걸 보지 못하는 것뿐이라는 게 더 정확한 말이 될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슬라이스 표본을 몇 백배 키운 현미경의 눈으로 보게 되면 무언가가 꾸물꾸물거리고 움찔움찔 움직이던 것이 또 생각이 난다.  


따라서 스티로폼에 뜨거운 물을 붓는 행위 자체가 매우 경악스러웠다. (그렇게 보자면 무엇 하나 마음 편히 먹을 음식이 있겠느냐, 공기 중 미세먼지도 위험하니 숨도 쉬면 안 되겠다 하는 사람들도 간혹 보았는데 개인의 의견과 생각임을 널리 양해해 주시길.)


그러니까 육안으로 보이는 것만이 전부라고 믿으면 안 된다. 


커피를 마실 때도 그렇다. 무해할 것 같은 종이컵 재질에 70도쯤 되는 물을 부어도 무수한 미세플라스틱이 녹아 나오는데(뜨겁지도 않은 상온 25도의 물도 여지없이 굉장히 많은 미세플라스틱이 나온다) 하물며 스티로폼에 펄펄 끓는 물을 붓는다면 얼마나 많은 환경호르몬들이 용출돼 나올 것인가. 마법의 스프만이 아니라 스티로폼이 그 뜨거운 물에 함께 녹아들어 가면서 환상의 맛을 끝내주게 만들어낸 것일까. 하지만 아무리 맛이 좋대도 스티로폼이 녹으면서 발암물질이 나온다는데 소중한 가족의 건강과 맞바꿀 순 없다. 그렇다고 건강을 생각해서 먹지 않겠다 다짐하자니 세상에 무엇 하나 마음 놓고 먹을 것이 없다. 그럼 어쩐다. 머리를 굴려본다.



유레카!

문제가 되는 용기만 바꾸면 될 일 아닌가?


컵라면 용기와 비슷한 크기의 사기그릇을 하나 꺼내 면과 스프를 담았다. 끓는 물을 넣은 후 뜨거운 열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그 위를 온전히 덮을 수 있는 납작하고 둥근 사기접시를 올려두었다. 정수기의 뜨거운 물보다 훨씬 더 뜨거운 끓는 물을 넣었기 때문에 약간의 증기가 빠져나가도 익히는 데 큰 문제는 없다. 살짝 덜 익으면 오히려 면의 식감이 더 바삭해지고 맛있다. 


3분 후 타이머가 울리고 사기에 담겨있어 컵라면처럼 보이지 않지만 내용물은 누가 봐도 컵라면을 아이들에게 하나씩 나눠 주었다.

연신 음~ 음~ 하며 후루룩 면치기까지 하는 아이들을 보니 웃음이 난다.

그리도 맛있을까. 


컵라면 본연의 맛을 느끼기 위해서는 제조회사가 제안한 레시피를 그대로 따라야 함은 물론이고 주어진 컵라면 용기에 그대로 조리해 먹어야 최상의 맛을 구현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가장 맛있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그건 기분 탓일지도. 모르면 몰라도 건강에 좋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기분을 내려는 이유로 가족의 건강을 해치게끔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다. 


외부와 아주 단절시켜 살 수 없고 어느 정도의 타협은 불가피하기에 자주는 아니어도 가끔은 너희 입을 즐겁게 해 주마.

환경호르몬을 힘써 막아낸 컵라면 아니 사기그릇라면이니 그래도 조금은 건강하다 생각해도 되겠지?


컵라면 용기에 뜨거운 물만 부어 간편하게 먹으라고 나온 건데 번잡스러운 과정을 거쳐 다 먹고 나면 귀찮은 설거지를 피할 수는 없겠지만 엄마라는 이름의 나는 마음이 한결 가볍다.






*글을 다 쓰고 났더니 이미 시중에 컵라면 전용 도자기 용기가 판매되고 있네요. 광고글이 아니라는 점 주의해 주세요. 집에서 사용하는 사기그릇으로도 충분히 가능한 걸요. ^^



매거진의 이전글 치매인 줄 알고 눈물이 찔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