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

by 강신명


밖으로 나오자 하늘이 서설로 채워진

수묵화를 그리고 있다


밤을 집어 삼킬 듯 쏟아지는 눈


문을 열기 전과 열고 난 후로

눈이 오기 전과 오고 난 후로


세상은 극명하게 선을 긋고 있었다


이스트처럼 부풀어 오른 새하얀 침묵

나는 푹푹 빠지는 시간 위를 뛰어다니며

기억의 파편을 찍었다


그날 나는 눈을 만나기 전 이터널 선샤인*이란

영화를 보았다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이 사랑의 고통에

기억을 지우려다 알게 되는 또 하나의 기억

이미 뜨겁게 사랑했던 연인이었음을,


다시 어둠 짙은 길목으로 들어가

나에게 줄 선물을 하나 골라 목에 걸었다


우체국 창문으로 알렉산더 포프의 시*와

내 발자국도 밀어 넣었다


하얀 눈발을 삼키며 돌아오는 길


문을 열자 눈도 따라 들어 왔다

나는 그 눈을 덮고 상처를 다 내놓은 채


눈보라 치는 설원에서 살아남는 꿈을 꾸었다



* Alexander Pope (영국의 대표적인 고전주의 시인)


행복은 순결한 여인만의 것인가

잊혀진 세상에 의해 세상은 잊혀진다.

상처 없는 마음에 비추는 영원의 빛

여기엔 성취된 기도와 체념된 소망 모두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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