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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끌림 29화

지한-7

첫사랑은 결국.

by 겨리

뒤풀이 술자리가 오랜 시간 이어진다.

함께 하산 후 모인 동아리팀원들 테이블마다 떠드는 소리와 웃음소리, 저마다의 이야깃거리로

소란스럽지만 한 테이블에 마주 앉은 둘의 분위기는 오히려 소음을 제거한 듯 적막함으로 꽉 차있다.

부러 그와의 대화를 내내 피하고 있지만 답답함이 끈질기게 그녀를 따라붙는다. 그 감정을 내뱉으려 잠시 숨을 고르지만 부족한지 자리에서 일어선다.

"어디가?"

옆자리에 앉아있던 동기의 물음에

"잠깐 바람 쐬러. 막걸리 문인지 머리가 너무 아프네."라며 비로 인해 습해진 가게 안을 빠져나온다. 랜만에 고개를 들어 본 하늘은

비는 그쳤지만 구름이 잔뜩 끼어 금방이라도 다시 쏟아질 듯하다. 우산을 챙겨서 나오려 했지만

다시 들어가 그를 마주하는 게 싫었던 걸까. 비 좀 맞으면 어때라는 생각으로 천천히 숲을 향해 걷는다.

근처 조용한 숲길 들어서자 머릿속 복잡하게 엉킨 생각들이 가닥씩 풀려서 모습을 드러낸다. 결국 반복되는 그의 강박적인 태도나 말투로 겪게 될 감정소모가 더 이상은 그가 안아주지 못할 것이라는 확이다.

낮은 숲길을 걸어 다시 내려올 때쯤 비가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우산을 미처 가져오지 못했기에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려는 그녀의 머리 위로 우산이 씌워진다. 언제 왔는지 지한이 우산을 들고 한 발짝 옆에 있다.

살짝 젖은 지유의 머리를 만지며,

"비 많이 맞았어? 머리카락이 다 젖었잖아.

계획하지 않고 움직일 때는 만약을 생각하고 준비해야지."며 건넨말에

걱정이라기보다는 미리 우산을 준비하지 못한 그녀를 탓하는 것처럼는지,

"비가 올지도 모르겠다 생각은 했지만 비? 오면 어때, 좀 맞는 거지 하고 우산 안 챙긴 거야.

난 너처럼 모든 걸 계획한 데로만 생각하고 움직이고 말하지 않으니까"

우산을 받쳐주던 지한은 지유가 방금 한말을 곱씹어 생각하다 어렵게 말을 꺼낸다.


"아까 나 때문에 기분 나빴지? 그런데 나 무엇보다 그런 게 어려워. 갑작스러운 변화나 예측 불가능한 상황이 오면 극도로 예민해져서 감정조절이 잘 안돼. 그때 넌 단지 논리적, 이성적으로 내가 틀리지 않았에도 나를 감정이 없어 상대방을 이해 못 하는 사람으로 몰아넣고 오히려 내가 잘못한 것처럼 다그치기만 하니까 순간 더 화가 나서 목소리가 커졌어."


"너에 관해 어려운 건, 상황을 유연하게 넘기 못한다는 거야. 이런 일로 싸움이 되풀이될 때마다 솔직히 쳐. 연애를 이성과 논리만으로 유지려 하지 말고 상대방의 감정의 흐름을 인정하고 알아주고 유연하게 으면 좋겠는데

사랑, 연애조차도 이성적인 시선으로만 보잖아.

그래서 네가 쉽지 않고 다름"


"난 오늘 오전에 있었던 얘기를 하고 있는데

넌 사랑, 연애라는 말만 하고 있어. 그건 너와 나의 문제가 아니었잖아. 그 상황을 그럼 이성적으로만 판단하고 평가하는 거지 감정을 넣어서 어떻게 유연하게 말을 해야 해?"


"좋아 아까상황만 본다고 쳐. 그럼 네 태도는 아무 문제없고 소리 지른 것만 미안하다는 거구? 그리고 내가 지친다는 건 이런 상황들이 계속 반복되니까

너의 사랑이란 감정에 의심이 들어서야.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생각하고 말하고 표현하는 것들이

너에게선 별로 안 보이고 오히려 왜 그래 야해? 란

물음으로만 늘 되받아치고 나를 이해시키려 드니까

혼란스러워.

이건 내가 항상 맘에 걸려왔던 일이라 지금 말하는 거지만 넌 나이, 성별, 지위에 차별두지 않고 누구든 성과 이름으로만 휴대폰에 저장한다고 했기 때문에 굳이 말은 안 했어.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더 이해를 할 수 없는 건 내가 싫으니 노력해 보라 얘기해도 넌 듣는 척도 하지 않고


"그건 맞고 틀리고가 아니라 사람마다 기준이

다른 거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난 내가 하던 방식에서 조금만 어긋나도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어. 핸드폰 저장된 이름도 세 글자가 아닌 두 글자, 네 글자여도 굳이 세 글자로 만들어 줄을 맞추는 거야. 그리고 이름이 있는데 애칭을 왜 굳이 저장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이런 행동을 이해 못 하는 건 네가 내가 될 수 없는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야."


"혹시 너 강박 있어? 글자수 맞추기, 시간 약속 지키기, 계획대로 만 되어야 하고 경우의 수에 부딪치면 화나고 수용 안되고. 네가 가진 이런 보편적이지 않은 행동들이 우리 심리학시간에 배운 강박적 인격특성이랑 아주 많이 닮아있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조용하던 숲길이 어느새 둘의 목소리로 꽉 채워져 간다. 우산은 함께 쓴 채 걷고 있지만 좀처럼 둘의 차이는 좁혀지지 않은 채로 가게 근처에 다다랐다.

실내로 들어가지 않고 야외벤치에 자리 잡은 지한을 따라 지유가 옆에 앉는다.

잠시 말이 없던 그는 웅크려 앉아있던 자세를 바로 세워 벤치에 등을 기대며 말을 이어간다.


"그럴 수도 있겠지. 나도 내가 평범한 인간이라고는 생각 안 하니까. 단지 그런 면은 누구든 조금씩 있는 거 아닐까? 그런 단어로 나를 단정 짓고 끼워 맞추지 말았으면 좋겠어. 우리 여기서 헤어지자. 난 저기 들어갈 필요 없을 것 같으니까."


그렇게 지유를 벤치에 남겨둔 채 혼자서 걸어 내려가는 길. 지한의 혼잣말이 이어진다.

"난 결국 연애가 안된다는 걸 알게 해 준 처음이자 마지막 사람, 너였어. OCPD 때문에 내가 일상에서 겪고 있는 강박적인 생각과 행동이 너에게 고스란히 들켜버렸고 그런 내 치부까지 사랑해 줄 수 없었던 너를 인정하기에 우린 여기까지 인 거야.

첫사랑은 결국 끝사랑이 되어버렸지만 앞으로 내 삶에서 이 같은 두 번의 상처는 없을 테니 이 또한 고맙게 생각할게, 지유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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