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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장복 Nov 11. 2021

이사했다.

오후 1시_ oil on linen_ 72.7x53cm_2010, 21

오후 1시_ oil on linen_ 72.7x53cm_2010, 21


2009.3.21 토. 오전 11시다. 초여름 같은 봄 날씨다. 처음 한남동을 그렸던 그 골목길을 찾았다. 하늘이 맞닿아 있어 그런지 골목길은 빛으로 가득했다. 그늘도 밝게 느껴졌다. 종이를 펴고 그리기 시작했다. 얼마쯤 지났을까. 한 남자아이가 살그머니 다가왔다. 옆에서 한참 지켜보더니 아예 계단의 구석에 자리 잡고 앉았다. 흘끗 눈이 마주쳤다. ''널 그림에 넣어줄까?'' 아이는 고개를 꾸벅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아이를 부르며 찾았다. 그림 속에 잠시 나타났던 아이는 그림이 진행되면서 희미하게 사라졌다. <13:00>




이사했다. 살림살이를 3층에서 2층으로, 그림들을 3층에서 1층 작업실로 옮겼다. 이사는 이사였다. 싸고 옮기고 들이고.. 정리하고, 정리하고. 벌써 열흘 째다. 종내에는 그림들에게 치여 발 디딜 틈도 없어질 판이다. 와중에 한남동 그림 하나를 꺼내 덧그렸다. 기억이 더해졌고 느낌이 짙어졌다.


오후 1시_ oil on linen_ 72.7x53cm_2010, 21


바퀴의 위력을 실감했다. 나무로 만든 2절과 전지 크기의 10단짜리 종이함이 세 개나 있는데 종이의 무게 때문에 오랜 시간에 걸쳐 서랍이 내려앉았다. 이삿짐꾼들은 그걸 통째로 옮겼다. 밧줄로 동여맨 후 장정 네 사람이 반짝 들어, 틀고, 밀어 다른 평지로 옮겼다. 일단 평지에 내려앉으면 굴러갔다. 아무리 무거워도 밀면 굴러갔다. 헌데 작은 턱에라도 걸리면 멈춰 섰다. 바퀴는 섬세하고 단순했다.


각을 없앤 동그라미가 각이 없는 평면에서 감당하는 무게가 어마무시하다. 바퀴의 움직임은 평면의 평평함에서 온다. 이는 서로 다른 차원의 문이 열리는 순간에 벌어지는, 놀라운 일이다. 2차원의 평면에서 바퀴는 점 또는 점선에 불과하고 3차원의 공간에서 바닥은 그저 납작하다. 세로의 눈에 가로는 높이의 시작이고 가로의 눈에 세로는 선이 못된 점이다. '바퀴가 굴러간다'란 사건은 이를테면 가로와 세로라는 전혀 다른 차원이 점으로 이어지는 일이었다.


자리배치에 고심했다. 어피차 비좁다면 아늑해야겠다. 몇 가지 원칙을 정했다. 첫째 동선을 확보한다. 체감적 동선이 막히면 답답해진다. 머릿속의 평면도는 체감되는 실재와 다르게 미로가 되기 십상이었다. 둘째 밖을 향한다. 작업자가 밖을 향해 있을 때 안쪽에 놓일 수 있다. 밖을 등지면 밖으로 밀려나는 꼴이 된다. 아늑함은커녕 안정감을 유지하기 어렵다. 셋째 바닥을 확보한다. 중력의 공간에서 물건은 바닥을 차지하며 좁혀 들어온다. 체적 단위로 수납공간을 계산하여 확장한다. 넷째 시각적 무게를 감안한다. 위아래, 좌우의 시각적 흐름이 유연하게 흐를 수 있도록 한다. 위가 무겁거나 한 곳에 뭉치면 불안정하거나 답답할 수밖에 없다.


무조건 버리자. 언제 쓸 일이 있을지도 몰라, 언젠가 꼭 쓸 일이 있을 거야, 이건 있어야 돼.라고 순차적으로 되뇌며 버리지 못한다. 집착의 전형이다. 살아오면서 버리지 못할 이유가 대폭 줄어들었지만 수시로 견물생심을 드러낸다. 눈에 안 보이면 없는 거다. 어디 있는지 몰라 똑같은 가위를 몇 개나 산다. 혹시 몰라 처박아 둔 물건이 흐름을 방해한다. 쓸 물건이라면 시선의 흐름 속에, 눈에 띄는 곳에 손이 닿는 곳에 두어야 한다. 시선의 흐름이 원활해야 공간에 활기가 생긴다.


구석을 비우고 틈을 두자. 구석은 주된 흐름에서 빗겨 나 있다. 구석이 차면 공간은 답답해진다. 고인물이 썩는 것처럼 퇴적물이 흐름을 둔화시킨다. 구석 떼기를 비워야 한다. 쉼표처럼 들숨과 날숨 사이의 여백, 물리적인 틈이 필요하다. 순순한 흐름을 위해서다. 자로 잰 듯한 짜임새와 함께 틈바구니가 있어야 한다. 꽉꽉 붙이지 말고 조금 떼어 놓자.


생산자이자 유한자로서 노동과 놀이가 구분되지 않는, 완전 노동을 구현하는 화가의 부단한 움직임이 작업실의 표면 질감을 형성해 나갈 것이다. 2021.11.10 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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