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난 사람이어야만 했을 내가 결코 잘날 수 없는 사람이었음을 깨달았던 어린 시절, 나는 이미 커다란 결핍 하나를 안고 살았던 걸지도 모르겠다.
자기 자신만큼 자신을 잘 아는 사람은 없다고 사람들은 믿지만 사실 그건 틀린 말이다. 우린 결코 우리의 두 눈으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타인의 눈을 거울삼아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인다. 거기서 관점과 가치관은 거름망 역할을 해줄 뿐이지 없는 모습을 창조해 내는 힘은 우리에게 없다. 그렇기에 난 주변의 평가에 예민했고 주변의 눈으로 본 내 모습은, 뭐라 할까, 그야말로 처참했다.
내겐 겉으로 드러나는 단점이 너무도 많았다. 작은 키에 안 좋은 피부, 말을 할 때면 어눌한 발음까지 그 모든 게 내 열등감이 됐다. 처음 보는 사람들은 대게 내게서 그런 모습들만을 찾아냈다. 그렇기에 학창 시절의 난 무시받지 않기 위해 날을 세우고 다녔고 스무 살의 난 일부러 더 밝고 당당한 모습으로 못난 자신을 감췄다. 자존감이 높은 척 연기했고 그런 내 모습을 좋아하는 사람들 또한 많았다. 하지만 난 그 사이에서 점점 망가져만 갔다.
난 나를 사랑할 수 없었다. 내 결핍을 메꾸려 노력했지만 결코 나를 사랑할 수 없었다. 결핍은 결핍을 낳을 뿐이었다. 사랑에 실패할 때면 늘 내 결핍이 먼저 눈에 들어왔고 높은 척 연기하던 자존감은 혼자 있는 방 안에서 어김없이 무너졌다. 눈을 감고 이상적인 내 모습을 머릿속으로 되새겼지만 그건 결코 내가 될 수 없단 걸 너무도 금세 깨닫곤 했다.
나는 결국 방법을 바꿨다. 잘난 사람이 될 수 없다면 최소한 좋은 사람이 되고자 했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끊임없이 생각했다. 주변에선 착한 사람을 호구라 부르고 비겁한 사람을 현명하다고 불렀지만 나는 행복은 좋은 사람이 되어야만 얻을 수 있다 믿었다. 나는 결핍으로 나를 바꿨다.
때로는 내가 못났기에 좋은 사람이라도 되어야 한다는 패배주의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열등감을 이겨내기는 어렵고 여전히 난 나를 의심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제는 내 결핍들을 증오하지 않는다. 못난 내 모습이 나를 좋은 사람으로 만들었으니까. 적어도 이제는 내 모습이 만족스럽게 느껴진다. 지금 당장은 이런 내 모습이 나를 불행하게 할지도 모른다, 누군간 나를 보고 내 모습을 못났다고 부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그저 못난 사람으로 남기엔 아까운 사람이란 걸 이제는 안다. 그 결핍들을 합쳐서 나는 좋은 사람이 될 테니까. 사람은 결핍으로 비로소 완벽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