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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너머 Nov 26. 2024

길 위에서 1,2 | 잭 케루악

자유와 방종. 


자유와 방종은 한 끗 차이다. 

책임과 의무를 따르지 않는 자유는 방종인 것인데 그 책임과 의무는 어떤 기준에서 고려 되어지는 것이며, 

누가 부여하는 것이고 평가가 어떻게 되어지는 지에 따라서 자유는 방종이, 방종은 자유가 될 수도 있다. 

길 위에서의 주인공 딘 모리아티에겐 자유로 일컬어지던 것이 그의 주변 사람들에겐 방종으로 불렸다. 

독자 입장으로 봤을 때도 어릴 적 부터 형무소 생활을 일삼고 방탕한 여자관계부터 과한 음주 

그리고 어디로 튈 지 모르는 예측불허함은 충분히 '방종' 이었으며 

언제 어떻게 갑자기 폭주할지 모를 딘은 충분히 위태롭다. 

하지만 내가 그런 딘을 딘의 주변인물들과 같은 시선으로 바라볼 수 없었던 이유는 '연민'이었다. 

그는 '자유'로 일컬어지는 것들을 연신 좇으며 이는 미국 대륙을 횡단여행 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주욱 뻗은 길 위에서 딘의 마음을 그나마 온전히 헤아려주는 것만 같은 

친구 샐 파라다이스와 함께 차를 타고 계속 달린다. 

고정된 수입원이 없이 정처없이 달리기만 하는 그들에게 당연히 안락함이란 기대할 수 없었다. 

하지만 밥은 굶어도 술은 마시지 않을 수 없었고 여자가 곁에 있지 않으면 안되었으며 

재즈 음악을 항상 즐겨야 했다. 

아침 식사는 김 빠진 맥주였다. 그리고 또 다시 그들은 계속해서 달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여자관계도 가뜩이나 복잡했던 딘은 몇 번이고 메릴루와 커밀 사에이서 우왕좌왕 하며 

두 여자의 마음에 간단히 생채기냈으며,그들의 관계는 딘의 방종으로 얼룩졌다. 

더 최악이었던 것은 딘은 잠시 자리를 잡는 것 같다가도 결국엔 그는 가만히 있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인생에 있어 추동력은 오로지 그 자신의 자유의지였다. 

그를 둘러싼 현실과 관계들은 구속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남들에겐 당연한 책임과 의무의 준수도 그에겐 힘든 것이었고 이는 그가 어찌 할 수 없는 영역이었음을 

확신한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딘에게 연민을 가졌던 이유도, 그래서 적어도 나만이라도 그는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었다고 생각해줘야지 라고 생각했던 것도 딘도 자기 자신을 어쩔 줄 몰라 

쩔쩔매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분명 그 순간 그 사랑에 충실했고 본능에,역할에 충실했지만 지속성의 유지에 있어서는 

그가 조절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니었음을. 그리고 그런 그 자신도 자신의 자유 하지만 남들에겐 방종이라 일컬어지는 것에 고통받는 자신의 사람들을 보며 괴로워 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절대 딘은 그런 자신의 모습을 이해해줄 것을 남들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허나 받아들일 뿐이다. 

자신의 이런 모습은 그 어떤 설명을 해도 관용의 자세로 용납되어짐이 어려울 것을 알기에 

본인의 몫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고 그저 웃는다. 

남들이 다 경멸의 눈길로 쳐다봐도 그는 짐짓 신경쓰지 않는 체 하며 웃기만 한다. 

그렇지만 난 그 대목에서 분명히 딘이 어딘가에서 울고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꾹 참고 있는 거라고.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화자인 샐 파라다이스는 매우 고마운 존재이다. 

딘을 딘 그 자체로 받아들여준 유일한 사람이니까. 

또한 샐이 딘과 가장 흡사한 세계를 가진 사람이기도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샐은 틀에 얽매일 수 밖에 없는 사회를 선호하지 않았으며 많은 친구들 중에서도 유일하게 딘만 묵묵히 

자유의 길을 걸었다.

책 초반에 같이 나오는 친구들은 그런 생활을 누리는 듯 보이지만 결국엔 다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데 

반해 딘은 계속해서 그의 여정에 동반자가 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내밀한 어떤 것을 공유하는 그들은 그 내밀함을 기반으로 여정을 계속하지만 그 여정 안에서도 딘은 

그 여정으로부터 다시 자유로워져야 했다. 

그래서 여행을 하다가도 다시 그가 사랑하는 누군가에게로 돌아가 잠시 생활하고 다시 여행에 나서기를 

반복한다. 그렇기에, 이 여행은 샐이 끝내야 했다. 

딘은 여행을, 이 삶의 방식을 끝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결코. 

하지만 그들의 마지막 여행이 되었던 멕시코 여행은 그들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던 사회의 모습을 

제시한다. 그들이 속해 있는 사회가 싫었고 자신들이 백인인걸 끝끝내 부정하고 싶어했던 그들에게 

멕시코란 그들이 그렇게 갈망하고 추구하던 자유가 가장 이상적으로 실현 되는 것만 같았기 때문에. 

그리고 광란의 밤을 보낸 날 밤, 홀연히 딘은 또 다시 샐을 떠났고 시간이 흐른 후 딘은 다시 돌아왔지만

샐은 이제 더 이상 길 위에서 목적 없는 드라이브를 끝 마친 상태였다. 결국, 샐이 끝냈다. 

비록 이 여행은 끝냈지만 길 위에서 끝없이 자유를 부르짖고 방탕하게 살던 딘에게 방종의 이름을 씌우지 않은 건 오로지 샐 뿐이었다. 딘이 그 때 사회에서의 생존 기제가 남들에겐 방종으로밖에 비춰질 수 없다는 걸 샐만은 이해해주었다. 

그리고 나 또한 그래서 나만큼은 딘을 '자유만을 갈망했던 사람' 으로 기억하고 싶다. 

어쩌면 그가 여행 내내 자신이 여행을 떠나야 하는 정당성을 잃어버린 아버지를 찾는 것에서 찾는 것 또한 

어릴 적부터 겪은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사회 시스템으로부터 이미 내쳐진 어린 시절의 그가

진정으로 원했던 건 그 사회로부터의 자유 였을 수도 있겠다고, 

그래서 난 그에게 연민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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