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만남
그와의 첫 만남은 워킹홀리데이를 통해 일하게 된 런던의 파이브가이즈 에서 였다.
그는 준수했고 첫인상도 너무 좋았다.
인상을 아-주, 굉장히 중시하는 나는 바로 그를 '좋은 사람' 이라고 내 머리에 입력했고
그는 날이 갈 수록 그 입력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했다.
발렌틴은 아시아 문화에 나름 관심이 있던 애였기 때문에 한국, 중국, 일본 사람을 구별했고
아시아인들의 특징이랄까? 어떻게 들릴 지 모르겠지만 서양 사람들과는 조금 더
내향적인 사람들이 많은 아시아인들의 특성(물론 개인적인 생각!)을 잘 알고 있는 친구였다.
그래서 사회생활로 어려움을 겪는 나를 티 나지 않게 이끌어 줬다. 내가 민망하지 않게.
걔(?)는 누구에게든 nice한 애였고, 모두 다 그를 좋아했으며 카리스마 보단 shy해 보이는 애였지만
발렌틴 특유의 사교성이 있었다. 뭔가 리더처럼 확 아우르는 건 아니더라도, 뭉근한 easy함이 그에게는
있었다. 나와 비슷하게 내향적인 것 같으면서도 다른.
일단 첫인상은 접어두고.
걔는 틸(계산대)에서 나를 가르쳐 줄때부터 나한테 좀 다르게 대하긴 했다.
연애를 한번도 해본 적 없던 나도 나한테 호감이 있는지 없는지는 당연히 구별 할 수 있었는데,
확실히 느껴졌다. 그가 날 마음에 들어하는게.
일할 때마다 내 뒤에 와서 장난치고, 일 끝나도 바로 가지 않고 내 틸 앞에 서서 장난 치고.
내가 일 하기 시작 한 이후로 몇 주 동안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발렌틴이 친해지려고
나에게 다가와줬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나는 그에게 인간적인 호감 그 이상의 감정을 가지지 못했고
단지 정말 좋은 애고 그래서 친해지고 싶다, 영국에 저런 남자 '친구' 하나 있으면 좋겠네 딱 그 정도.
남자 친구를 사귀어 본적이 없었기 때문에 상상도 못했었고.
그런데 하루는 내가 점심을 먹어야 했고 발렌틴은 shift가 끝나서 집을 가기 전
자기도 먹겠다며 조인을 하길래 나, 발렌틴 그리고 몇몇 친구들이 같이 점심을 먹었는데
그때부터 묘-하게 파이브가이즈 동료들이 나와 발렌틴을 이어주려는 기미가 보였다.
흠- 하고 있던 찰나, 한 친구가
'발렌틴 잘 생기지 않았어?' 라고 했고 난 발렌틴을 한번 쳐다 본 후
'응, 발렌틴 잘 생겼지.' 라고 대답했다. 플러팅 목적이 전혀 아닌, 단순히 내 생각을 말한 것 뿐이었다.
그러자 '발렌틴 괜찮지 않아? 되게 좋은 애야-' 라는 뉘앙스의 말들을 다시 하길래
'응, 좋은 애 같아' 라고 덧붙였는데 그 때 부터 발렌틴의 귀가 정말 새-----빨개지는거다.
그 때 바로 확신 했다.
아, 얘가 나 많이 좋아하는 구나.
또 하나 결정적이었던 건 아시아에 대해 얘기하다가 발렌틴이
눈 찢는 제스처를 취하는 거다! 아니.. 나 좋아한다면서 어떻게 저런 인종차별적인 제스처를
내 앞에서 대놓고 하는거지..? 난 순간 놀라서 정색하면서 뭐하는 거냐고 물었고
발렌틴은 내가 본 것 중 제일 당황한 얼굴로 왜냐고 물었다.
그는 그게 잘못 된 제스처인 줄 모르고 단지 묘사 정도로 생각했지만 난 그게 절대 아니라고 따끔히 말했다.
내가 처음으로 굳은 얼굴로 대응 한 것을 보고 꽤나 놀란 눈치였다.
그 후 발렌틴은 집에 가고 나는 shift가 끝난 후 동료와 술 한잔 하러 펍에 갔는데
폰을 확인 해보니 문자가 3-4 통이 와있는거다. 다 발렌틴이었고 모든 문자가
아까 그 제스처에 대해 미안하다는 내용이었다.
그 문자들을 보니 안쓰럽고 귀여워서 술도 들어가 잠깐 알딸딸 했겠다 전화를 걸었다.
생각해보니 그게 나와 걔의 첫 전화였는데.. 풋.
놀란 눈치로 전화를 받은 발렌틴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고
내가 신경쓰지 말라며 안다고 너가 의도한거 아닌거 알지만 조심해주라고 다시 말 하다가..
내가
'너 나 좋아해?' 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나도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추측해보건대, 이 글의 시점 이전에 이미 3주 정도 발렌틴이 일방적으로 나에게
연락을 하고 있었고 난 아마 그 시기가 답답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깜짝 놀라며 '그런 걸 부끄럽게 왜 물어. 좋아하지.' 라며 대답했다.
그래서 내가 다시 한방 세게 날렸다.
'아니 그러니까 이성적으로 나 좋아하냐고.'
몇 초의 정적 후에 '응..' 이라고 하더라. 그래서 난 '그럼 우리 오늘부터 사귀는거다?' 라고 하고 끊었다.
그게 우리의 1일이었다.
나 그때까지 남자친구 사귀어 본적 한번도 없었는데.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그냥 질러버렸다. 사실 그때는 걔에 대한 마음이 진심이라기보다
단순히 호기심이 더 셌던거지만. 외국인 이라는 호기심+ 첫 남자친구를 사귀게 되면 어떨까 하는 호기심.
후에 발렌틴은 인정했다.
내가 아니었으면 분명히 우리는 훨씬 더 늦게 관계를 시작했을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