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연애 치고.. 나 괜찮은 것 같은데..?
발렌틴은 첫 데이트 날 굉장히 꾸미고 온 티가 났다.
귀여웠지만 내 스타일이 진짜 아니었다. 후에 걔한테 말한 사실이지만 걔가 좋아서
만났던게 아니고 진짜 호기심 때문이었다. 남자친구를 사귀면 어떨까 하는 순전한 호기심.
그래도 일단 남자랑 뭔가 데이트 한다는 느낌으로 만난건 인생 처음이었기 때문에
설레는 마음으로 데이트를 시작(?)했다.
스카이가든도 가고 (스카이가든은 런던에서 고층 뷰를 즐길 수 있는 건물) 즉석으로 영화도 봤다.
영화관에 간 것도 처음이었는데 남자랑 영화를 보러 가다니.
영화는 미녀와 야수 실사판이었던 걸로 기억은 하는데 기억도 안난다. 설레서 라기보다
어쨌건 날 좋아하는 남자애였기 때문에 신경 쓸게 꽤 있었고 영화는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헤어질 시간이 다 됐지만 발렌틴은 떠나고 싶어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 애의 강아지 같은 눈을 보자니 잠시 죄책감이 들었지만 또 나는 금방 잊고 내가 뭘 했냐면..
그와 헤어진 후, 아는 언니를 만나 클럽 같은 펍을 갔다.
물론 별 다른 일도 없었고 그럴 만한 간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그땐 '그냥 한번 만나보는 거지' 하는
마음이 너무 컸어서 그런 짓도 했더랬다.
우리는 파이브가이즈에서 만났지만 난 이 관계를 비밀로 가져가길 원했고 발렌틴에게도 그러고 싶다는
의사를 아주 분명하게 밝혔다. 그때 우리 사이의 역학관계는 너무 확실하게 내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기에
모든 내 의견에 발렌틴은 Yes 맨이었고 파이브 가이즈에서는 우리의 관계를 아무도 몰랐다.
어떤 포인트까지는.
그래도 일 하는 곳에 안 그래도 친구를 잘 못 만들어서 힘들었는데 남자친구라는 존재가 있다는 건 든든했다.
남자친구로 여기지 않더라도 나를 지켜줄 애가 한명쯤은 있다는 그런..?
우리는 서로 일을 하는 입장이어서 날을 잡고 데이트를 막 자주 하지는 못했지만
거의 매일 만났고(아주 조금이라도)
가끔 shift가 겹쳐서 같은 시간대에 일하게 되면 속으로 나는 쾌재를 불렀다. 또 일 하기 전에
잠시 hide park 같은 곳에 들러 계속 걸었다.
발렌틴의 룸메이트가 잠시 holiday를 떠났을 때는 집으로 초대를 해줘서 근사한 저녁식사도 만들어주고.
또 중간 중간 내 대학교 친구들이 유럽 여행하면서 영국에 들려서 나랑 놀아주다 갔는데
동기 한명이 되게 이쁜 친구였다. 열등감이라고까지는 말하면 웃기지만 이 친구가 나보다 이쁘다라는 생각이
나에겐 당연했고 발렌틴을 처음 소개시켜주는데 걱정도 됐다. 내 친구가 너무 이뻐서 얘를 좋아해버리는 거 아냐? 라는 이상한 생각도.
근데 사랑이라는 감정은 저--엉말 신기한게(사랑에 대한 고찰이라는게 나에겐 다소 오글거리지만)
난 내 동기에게 발렌틴을 남자친구라고 소개하지 않았지만 내 동기는 단번에 알아챘다.
어떻게 알았냐는 쑥스러운 나의 질문에
"언니, 바라보는 눈 자체가 달라. 그건 진짜로 숨겨지지 않더라."
라고 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이 시점에도 그때 날 바라보는 그의 눈이 기억 난다.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너가 너무 좋아 죽겠다는, 눈으로 더 담을 수 없어 아쉽다는
그런 눈이 있다. 사랑을 하고 또 사랑을 주는 사람에게는.
그 눈엔 '얘가 너무 사랑스러워 미치겠어!' 라는 마음만 담겨 있는 게 아니고
'얼른 내일이 와서 널 보고 싶다', '오늘 하루 조심히 보냈으면 좋겠다', '너가 친구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
좋겠다' 등등의 모든 말들이 그가 날 바라보는 눈빛으로 치환된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는 계속 그렇게 날 바라봤고 난 감사해할 줄 몰랐다 그때는.
또, 발렌틴은 내 동기보다 날 예쁘다고 생각했다.
'아싸, 내가 더 이쁘대!' 라는 승리(?)의 감정을 말하고자 쓴게 아니고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객관적일 수 없고 그의 주관적인 기준은 오롯이 그녀에게 유효하다.
그 유효성이 단 하나의 관계에만 적용된다는 건 꽤나 낭만적인 거 아닐까?
알랭 드 보통이 말하는 '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에서 사랑의 주관성은 정확히 그가 나에게
선사하던 시선과 일치했다.
사랑하면 독창적이고 특색있는 방식으로 매력에 관한 자신의 관념을 재규정한다고.
완전 동의한다.
그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크기의 사랑을 이따금씩도 아니고 매일 매일 줬다.
어디를 가도 그의 마음속 안엔 내가 가득한게 티가 났고 눈에서는 애정이 진짜 말 그대로
뚝- 뚝 하고 떨어졌다.
매번 내 곁에 있던 걔라는 존재 때문에 파이브가이즈 일이 힘들어도 버틸 수 있었다.
그렇게 과분하게 사랑을 주었던 그에 비해 나는
진짜로 나쁜 년이었다. 그가 나에게 주는 사랑을 너무 당연하게 여겼고
걔의 인생에서 내가 소거되는게 더 큰 손실일 걸 알고 있었으며 그 전제조건을 가지고 행동했다.
걔는 날 만나도 한참 잘못 만났던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