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엄마한테 들켜버렸다.

엄마 미안

by 글너머

우리 둘은 점점 가까워졌다.

난 아주 못되게 굴 때도 정말 많았지만 그때마다 발렌틴은 날 잡아줬다.

예를 들어 내가 쉬고 발렌틴이 일하는 날 괜한 심술을 부려

발렌틴은 날 달래주러 30분 쉬는 시간 그 짬을 이용해 우리 집 까지 와 날 달래주기도 했고

집에 가는 길에 나름 크게 싸운 우리는 내가 나 갈거라며 발렌틴을 뿌리치고

그는 날 잡고 하는 과정에서 누군가 발렌틴이 날 괴롭히는 거라고 오해해서

나에게 '도움이 필요하니?' 라고 물어보는 상황까지 겪었다. 사실 내가 겪은거라기 보다

발렌틴이 겪었던거고 그때의 발렌틴은 너무나 비참해 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한없이 미안하고 왜 그랬나 싶고.

그런데 정말 모순적이게도 또 그때가 그립다.

발렌틴이란 사람을 넘어서서 그런 순정은 그 나이에 했던 사랑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거 아닐까 하고.

이럴 땐 한 쪽으로만 흐르는 시간이 너무 야속하다.

필수 불가결하게도 우리는 끊임없이 변하고 또한 높은 비율로 조금 더 모든 것에 냉소적이 되는건

인정하기 싫지만 보통 그러하기에.

그래서 그때의 발렌틴은 이제 그 발렌틴이 아니란 것도.


그의 순정은 다시는 이제 내가 그 누군가에게도 받아보지 못할 것이기에 아직까지 그 시절에 집착하나보다.

뭐 물론 내가 아직 걔를 못 잊고 그렇다기보다 그냥 그 날들을 잊지를 못하겠다.

별 별 생각이 다 든다. 미안하고, 안쓰럽고 그렇지만 그립고.

혹자는 그런 남자들 어딘가에 무조건 있다고 하지만 난 그런 '누군가를' 만나는 것에 중점을 둔다기보다

그냥 '그때의 걔'가 아니면 안되는 것이랄까.

뭐.. 이렇게 곱씹어봤자 왠지 모르게 울적해지니 과거 회상은 이쯤 해두고.


그렇게 파이브가이즈도, 연애도 순조롭게(?)해 가며 워킹홀리데이를 나름 잘 보내고 있을 쯤

내가 설정해 놓은 데드라인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난 혼자서 '7월달 쯤에 혼자 여행을 갔다와야지. 그 때 파이브가이즈를 그만두고, 새 job을 찾아보는거야.

그리고 발렌틴이랑도 그때쯤 헤어지고' 라는 이기적인 생각을 했다.

그리고 7월이 다가오기 전에 얼른 파이브가이즈에 홀리데이 신청을 해야 했다. 홀리데이 스팟을 뺏기지

않으려면! 발렌틴한텐 미리 귀띔을 해줬다. 나 혼자서 7월달쯤에 홀리데이 갈 예정이라고.


근데 하루는 갑자기 발렌틴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할 말이 있다는 거다.

그 할 말이란 예상하지 못했던 거였지만 또 동시에 예상을 어느 정도 했던 것.

'나 너랑 같이 홀리데이 가려고 나도 신청했어.'


내가 만약 발렌틴한테 아무 감정도 없었더라면 왜 그랬냐면서 정색했을 테지만

내심 반가웠다. 그 기간동안 거의 매일 만났던 우리는 의식 못했지만 적어도 난 무한한 사랑을 주는

그에게 보호받는 다는 느낌 그리고 유대감까지 느꼈고 당황하는 척 했지만 사실 좋았다.


우리는 그래서 스페인으로 떠났다.

바르셀로나-그라나다-말라가-세비야로.

IMG_1743_Original.jpeg

처음 가보는 스페인, 그리고 첫 남자친구와의 동행이라니 설렜지만

또 나름 대담했다.

한국에서도 남자랑 여행 가본적 없던 애가 외국에서 남자친구를 처음 만나고 여행까지 간다니

우리 부모님이 아시게 된다면..생각하기도 싫었다.

근데 도둑이 제발 저린다고 떠나기 전에 엄마한테 휴가에 대해 짧게 브리핑 하다가 누구랑 가느냐는 물음에 그냥 뻥을 잘 치면 됐는데 거짓말을 하면 무조건 티 나는 나는

'아 여자 친구 한명이랑 남자 친구 한명이랑 가, 파이브가이즈에서 만난 친한 애들이야' 라고 했는데

엄마와 딸이 괜히 엄마와 딸이 아니다.

왜? 딸에 관한 레이더, 그리고 그 레이더의 정확도는 거의 100%다.


엄마는 석연치 않은 목소리로 끊었고

바로 날아온 카톡.

'맨날 맨날 같이 사진 찍어서 보내.'


맘이 무거웠지만 에이 설마- 걸리겠어. 했는데 바르셀로나에 와서도 엄마한테 편하게 영상통화를 하지 못하는 내 마음은 천근만근이었다.

그리고 그때의 나는 너무 순수했어서 그냥 아무 사진이나 골라서 보냈으면 될걸

그걸 못해서 허둥 대다가 엄마한테 실토했다. 남자친구와 같이 여행 왔다고.

이것만 보면 내가 능동적으로 말한 것 같지만 엄마의 은근한 압박에 난 들켜버린거다.

엄마는 그 이후로 나에게 카톡을 하지 않았다.

이전 02화02.너무나 나에겐 과분했던 초기의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