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진짜로 너무 행복했었던 날들.

장거리 연애의 좋은 점을 알았달까

by 글너머

나는 급하게 사촌언니한테 SOS를 요청했고 내가 남자친구가 생겼단 걸 알고 있던 언니가

어떻게 잘 우리 엄마를 달랬던 것 같다(?).

마음이 너무 무거워서 전전긍긍하고 있던 중 그 다음 날 엄마한테 아주 긴 카톡이 날아왔다.

사실 엄마한테 거짓말 한 것, 말 하지 않은 것 게다가 첫 남자친구이고 외국인이고

여행갔다는 것 까지 너무 한꺼번에 받기에는 감당하기 어려운 소식들이어서 당황했다고.

그래도 축하해줘야 하는 일인데 이렇게 알게 되서 아쉽다고, 또 엄만 널 믿는다고.


지금 생각해보면 이렇게 딸에게 말해주는게 절대 쉬운 일이 아닌데.

난 '엄마' 금수저다.


Anyway, 이제 반 official 이 됐기 때문에(아빠는 몰랐으니까) 여유롭게 여행을 즐겼다.

일주일 넘는 여행 동안 당연하게 난 발렌틴에게 투정도 엄청 부리고

갖은 심술이란 심술은 다 부렸지만 그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참을성 있는 사람이었고 더 나를 사랑했다.

옷을 어떻게 입든, 머리를 어떻게 묶든 눈에서 꿀이 뚝뚝.

스페인은 음식도 맛있고 바다도 이쁘고 뜨겁게 작열하는 태양도 우리에겐 로맨틱하기만 했다.

초기에는 조그만 것도 재밌었으니.


스페인을 갔다와서도 난 영국 워킹홀리데이동안 여행을 많이 다녀야지 라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곧바로 여행 목적지를 찾아 나섰고, 때마침 또 다른 대학교 동기가

어학연수로 독일에 온다고 하길래

'오 그럼 9월에 옥토버 페스트 갈까?' 라고 결론.

여행 예약은 순식간에 진행됐다. 근데 그럼 발렌틴이랑 떨어져야 하네..?

나와 발렌틴은 그때쯤엔 맨날 붙어 있었다. 발렌틴은 이사를 나가야 했고 새로 이사 온 방이

나와 걸어서 한 10분 정도 거리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굳이 떨어져 있지 않아도 됐다.


연애를 하면 정말로 나도 몰랐던 또 다른 나의 모습을 끊임없이 발견하게 됐는데 예를 들어

내가 생각 훨씬 이상으로 남자친구에게 의존을 정말 많이 한다는 것, 외로움을 엄청 탄다는 것.

어떤 포인트 이후로는 얘가 없으면 불안하고 무서웠다.

그걸 처음으로 피부로 느꼈을 때가 바로 독일에서 였는데 사실 떠나기 전에는 별 생각 없었다.

기다리는 친구도 있겠다, 작년에 혼자서 여행도 갔다온 애가 이거 하나 못하겠어

라는건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이미 내가 나를 바라보는 태도 기저에 깔려있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뮌헨 말고 베를린도 가고 싶던 나는 발렌틴에게 베를린으로 넘어오라고 말했고

우린 베를린에서 또다른 여행을 하기로 계획 되어 있었기 때문에 무서울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 말이다.


근데 발렌틴이랑 헤어져서 공항 게이트에 들어가고 security 검사하는

그 모든 과정의 구석 구석에 두려움이 깃들었다.

여행 뿐만 아니라 런던에서도 하나 하나 다 발렌틴이 해줄거고 뭔 일이 생겨도 그가 옆에 있다는

안정감이 내가 키워나가고 있던 독립심의 한 부분을 마모 시키고 있었나보다.

독일에 도착해서 친구를 만나기 전에도 난 길 잃은 미아처럼 길 찾는 방법을 적극적으로 모색할

생각은 안하고 발렌틴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밖에 안했다.

친구를 만났을 때 '걔가 도대체 너한테 뭔 짓을 했길래 얘가 이래' 라는 말까지 들었으니.


그래도 친구와 성공적으로(?) 여행을 마치고

나는 Flixbus 라는 버스를 타고 뮌헨에서 베를린까지 넘어가야 했는데 그게

장장 7시간을 달려야 했다. 돈 없는 알바생은 돈을 아껴야 했기에 그 버스를 새벽에 꾸역꾸역 타고

먼 거리를 달려 베를린 도착.

버스에서 내리기 20분 전부터 기분 좋은 긴장이 지속 됐다. 5일만 떨어져 있었는데도 걔가 그리웠다.

버스에서 내려 짐을 찾고 이리 저리 둘러보고 헤매다 결국 찾은 나의 발렌틴.


환하게 웃으며 나에게 달려오는 걔를 보고 있자니 모든 긴장이 다 풀리고

훅-하고 찾아오는 안도감에 난 걔 품으로 푹 하고 쓰러졌다.

이 순간은 지금까지도 내가 지난 연애 생활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들 중에 하나이다.

우린 그 이후 검색 없이 그냥 계속 걸어다니고 돌아다니다 배고프면 맛있는거 먹고

아무 계획 없이 그러나 너무 행복한 베를린 여행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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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의 스페인

9월의 독일


걔와 함께라서 더 행복했다.

그리고 그때 어렴풋이 그 생각도 했다.

'장거리 연애가 이래서 좋나..?' 오랜만에 안 보다가 다시 보니까 사랑이 더 샘솟는 걸

내가 직접 경험하면서 장거리 연애는 나쁘지만은 않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곧 장거리 연애를 해야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명확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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