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다 파악해버린 그.
나와 발렌틴은 1년 간 가까워져도 너무 가까워져버렸다.
슬프게도 '적어도 우리 관계에서는' 가까워졌단 말은 서로간에 지켜야 할 선을 자주 넘나들 수 있게 되었다는 말과 같았고 그 1년동안 많이도 싸웠다.
물론 당연히 100에 90은 발렌틴이 져 줬고 그 사실을 통해 항상 그가 날 사랑한다는 사실을 믿었다.
여전히 그의 눈은 사랑을 그득히 담은 채 날 쳐다보곤 했으니까.
싸워도 잠시 팽-하고 토라지면 그는 슬며시 다가와 날 챙겨주는 사람이었고
발렌타인데이에도 우린 예외없이 말다툼을 했는데 꽤나 큰 말다툼이었다.
그래도 나름 기분 내보겠다고 발렌틴이 사는 곳 바로 옆에 있는 식당 예약도 하고 해서 분위기 좀
내보려고 했더니 이런 일이 벌어져 너무 속상했지만 일단 예약은 한거니까 옷도 나름 차려입고
발렌틴을 만나러 갔다. 아마 내가 발렌틴 집에 싸우고 난 후 갈 수 있었던 것도 그가 결국은 지고
들어올 거라는 무의식적 예감이 존재했으리라.
역시나 날 기다리고 있던 건 초콜릿과 꽃 한 송이였다.
그 모습을 보고 난 펑펑 울었다. 죽이 돼도 밥이 돼도 항상 날 1순위로 두는 그를 보면서
너무 미안해지고 난 왜이렇게 얘한테 잘해주지 못하는가를 생각하며 울었고
그는 또 나를 토닥였다.
그 장면들, 그 날, 그 순간만 생각해도 가슴 한쪽이 저릿 저릿하다.
근데 어느 새부턴가 발렌틴은 날 너무 다 파악해버렸다. 나란 인간이 얼마나 '비'독립적인지,
헤어짐을 결심할만큼 다부지지 못한 애란 것도.
관심 없는 척 하지만 항상 나에게 관심을 주기를 바라는 '소심한 관종(?)'이란 것도.
게다가 나는 위에 말했듯이 선을 자주 넘었다. 일례로, 싸울 때마다 자주 헤어지자고 말했다.
이것도 우리가 관계의 초기에 발렌틴이 나랑 헤어지는 건 불가능하다고 느끼던 그 시절
우리의 관계에 내가 사용할 수 있는 무기가 될 수도 있겠다는 걸 이용한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이제는 그 유통기한이 지나가고 있었다.
하루는 우리는 oxford 길거리에서 대판 싸웠고 난 여느때와 달리 '나 내 집 갈거야!' 하고 휘적휘적 발렌틴의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아니, 보통 때라면 얘가 내 뒤에서 천천히 걸어오다가 날 잡아야 되는데 별 다른
기척이 없길래 뒤를 돌아봤더니 발렌틴은 날 등지고 걸어가고 있었다.
우습게도 난 발렌틴을 잡았고 발렌틴은
'넌 어떻게 내 신경을 하나도 안 쓸 수가 있어? 너 날 그렇게 뒤에 두고 가면 내가 걱정되지도 않아?
내가 몇번 말했잖아 나랑 같이 걸으라고, 나 뒤에 두지 말라고.'
발렌틴은 끔찍이도 자기를 뒤에 두고 가는 걸 싫어했는데도 난 그 행동을 항상 반복했다.
우리가 싸울 때마다.
또 한번은 pub에서 밥을 먹으려다가 말다툼은 예고없이 벌어졌다.
버릇을 아직 고치지 못했던 나는 또 집에 가겠다고 협박했고 발렌틴은 이제 꿈쩍하지 않았다.
너 가면 난 너한테 정말 실망할거고 이제 잡지도 않을 거란 말만 하고선 날 쳐다보지 않았지만
난 설마설마 하며 떠났고 역시 발렌틴은 날 잡지 않았다.
그날 집으로 가는 길에 난 펑펑 울었다. 이제 발렌틴이랑 진짜 헤어지는 건 아닐까 생각하며.
별 별 생각을 다 했지만 마음 한 켠엔 '설마 우리가 헤어지겠어' 란 맘이었다.
구질구질했던 내가 도착한 곳은 다름아닌 발렌틴 집 밖이었고
'너 방에 있는 내 물건 가지러 왔어' 라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하던 날 그는 단번에 알아챘다.
내가 '척' 하고 있다는 걸. 발렌틴은 그런 날 본 후 옅은 한숨을 쉬고 날 바로 안아버렸다.
'그러니까 이제 그러지마. 왜 널 힘들게 해. 그렇게 하는게 좋은 방법이 아니잖아.'
라며 날 꼭 안아주고 달래주고 방에 데려가 배고프지 않냐며 간식도 가져오고.. 그랬다 걔는.
그렇게 몇번의 반복적인 흐름에서도 우린 익숙해져 갈 만큼 자주 싸우고 화해했지만
난 점점 우리의 역학관계에서 내가 밀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얘는 내가 없으면 안되는 애인줄 알았는데 이젠 우리 둘의 자리가 바뀐 것 같다는.
물론 지금은 그런 생각들이 쓸모 없단 걸 알지만 그땐 그게 나에게 중요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내가 그랑 싸우지 않는 다는 건 불가능했고 우린 또 싸웠다.
또 우리 둘은 각자의 집으로 떠났고
이번엔 난 발렌틴의 집으로 가지도, 발렌틴에게 연락하지도 않았다.
연락하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내 방에서 슬퍼하면서 또 별별 시나리오를 다 그렸다.
그리고 끝끝내
발렌틴도 나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