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고비를 넘기니 동거를 하자고..?

동거..?

by 글너머

진짜, 진짜로 연락 안오는거야? 우리 이제 진짜로 헤어지는 건가?

그때의 밤은 잊혀지지 않는다. 우리 둘은 항상 헤어지네 마네 했지만 항상 싸움의 끝은 누군가의 방이었다.

따로 잔 적이 손에 꼽을 만큼 우린 가까운 거리에 산다는 이점을 이용해 항상 하루를 같이 끝냈는데,..

정말 피치 못한 사정이 아니고서야 따로 하루의 끝을 맞이 한 적이 없는데..

이번엔 얘가 정말 맘 먹은게 아닐까? 얘가 나같이 못된 애한테 지쳐서 정말 나가 떨어진건가?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고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그 후에 내가 구질구질하게 걔한테 문자를 했는지 안했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명료하게 기억 나는 건 발렌틴이 그 날 밤에 결국 우리 집에 왔다.


아마 걔가 자발적으로 왔을리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높은 확률로 연락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합리적 추론. 여튼, 이제부터 굉장히 남들 눈엔 우스울 얘기지만

우린 서로 침대에 누워서 드라마를 찍어댔다. 이건 아마 우리가 같이 보내는 마지막 밤일 거라느니, 별 진짜.. 지금 생각해보면 꼴값이다. 근데 그때는 정말 진심이었다구..!

왜냐면 내가 사실 마지막 밤이라는 둥 이제 정말 헤어지는 거라는 둥 발렌틴의 맘을 떠보려고, 그

는 그럴 생각이 없다는 뉘앙스의 그 어떤 것이라도 듣기 위해서 별 소리를 다 했지만 발렌틴은 어떤 확언도 하지 않았다.

조금은 다른 그를 보고 '아.. 얘 진짜로 맘 떠났구나 마지막까지 그냥 나를 챙겨주려고 마지막으로 온거구나' 를 느끼며 가슴 저릿한 밤을 보냈다.


사실 잠도 못자고 난 혼자 훌쩍거리며 밤을 지샜는데 쿨쿨 세상 모른 채 자는 그를 보고는 또 한번 '아 얘는 이 이별이 아무렇지 않구나' 라고 느끼며 더 가슴 아파했다.

난 그 다음 날이 오전 shift였기 때문에 먼저 집을 떠나야만 했고 떠나기 전에 너무 슬퍼서

또 혼자 드라마를 찍었다. 아니 근데 그때는 정말 진심이었다구!

여튼 그때는 정말 나랑 걔랑은 끝났고 난 일도 맘에 안들고 이제 영국을 떠야 하나 까지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 포인트에선 이미 발렌틴이 없으면 영국에서 혼자 잘 살 자신도 없었다.


그 날 일을 갔는데 다행히도 바쁘지 않았고 거기에서 어느 정도 친해진 영국계 필리핀 여자애가 있었는데

그 애한테 나 헤어졌다고 하면서 울었다.

그 전에 그 여자애가 나한테 자기 남자친구 고민을 얘기를 가끔 했었고 난 그걸 들어주면서

조금씩 친해졌었는데 하필 그 여자애도 남자친구와 사이가 멀어졌다더라.

우리는 서로를 위로해주며 위안받았다.


그 500일의 썸머 영화에 보면 그 남자 주인공이 썸머에게 차이고 나서 온 세상에 먹구름이 끼는 것만 같은

경험을 하는 장면이 있는데, 내가 딱 그랬다. 공교롭게도 그때 런던의 날씨도 흐렸고

이제 shift가 끝나면 집에 틀어박혀 울 일 밖에 안 남았네 하고 있었다.

발렌틴을 집에 두고 나오면서 울고, 출근 하는 길에 울고, 그 여자애랑 남자친구 얘기하면서 울고.

이미 눈은 정말 퉁-퉁- 부어있었고 더 부을 게 없겠다 싶은 정도로 부을만큼 많이 울었다.

이제 집으로 가는 길, 운명처럼 날 만나러 오는 발렌틴을, 날 잡으러 오는 발렌틴을

마주치고 싶었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1%의 기대감을 가지고.

그렇지만 99%의 절망감으로 집을 향해 걷던 중.


발렌틴이 걸어오는게 저-기서 보였다. 걔가 날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난 발렌틴을 보자마자 안도감, 고마움, 미안함 그 모든 감정들이 뒤섞여 으앙-하고 울었고

발렌틴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날 꼭 안아줬다.

정말 어찌나 맘이 푹-하고 풀리던지. 그 그런 감정 있잖아요 스트레스가 한껏 쌓인 날

펑펑 울고 나면 마음이 뻥 하고 뚫리는 것만 같은 후련함! 딱 그거였다.

아, 나와 그의 관계는 아무 문제가 없구나. 고비를 넘겼구나.


지금 생각해보면 걔가 그때 뭔 생각으로 왔는지 모른다.

나랑 정말 헤어질 마음이 없었던건지(쿨쿨 잤던 거 보면 정말 우리가 헤어질 거라고 생각 안해서 그런지도..?) 아니면 아무리 생각해봐도 난 걔 없으면 안되겠다 였는지는.

어쨌건 우리는 아주 큰 고비를 하나 넘겼고 우리 둘 사이의 사랑의 밀도가 훨씬 높아진 걸 느꼈다.

그 고비를 넘긴 이후 그는 방점을 찍어버린다.


'우리 같이 살자. 어쨌건 맨날 같이 지내는데 도대체 왜 돈, 시간, 거리를 낭비해야해?

그렇지 않아? 고집 그만 부리고 같이 살 공간 찾아보자.'


사실 발렌틴은 사귀고 점점 우리의 사이가 무르익을 무렵부터 맨날 물어봤다. 같이 살면 안되냐고.

물론 유럽인인 그는 그런 개념이 그다지 낯설지 않았겠지만 난 완전한 유교걸이었고 첫 남자친구였고

어쨌든, 동거니까.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고 항상 흘려들었는데, 이번의 발렌틴은 진지했다.

동거 하자고????? 진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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