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많이 돌아다닌 만큼 많이 싸운 우리.

아마 이때부터 너의 밑음은 옅어지고 있던 걸까.

by 글너머

워홀 초기 나의 가장 큰 목표는 여행 많이 다니기였다.

영국에 살면 그런 혜택은 누려야 된다고 생각했다. 유럽 어느 나라든 쉽게 쉽게 갈 수 있는 것.

2017년에도 그래서 자주 자주 다녔었고 2018년까지도 나의 생각은 유효했다.

내가 가보고 싶던 나라 중에 헝가리가 있었고 난 거길 발렌틴에게 가자고 졸랐는데,

그도 이번엔 요구사항이 있었다.

자기 나라를 가고 싶다고, 루마니아를 너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그.

사실 루마니아는 내 bucket list에 없었기 때문에 그다지 구미가 당기는 제안은 아니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사랑하는 사람한테 자기 나라를 보여주고 싶다는 그의 마음을 좀만 더 이해해 줄걸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달갑지 않은 티를 냈지만 이미 같이 살자는 그의 제안도

거절을 수없이 하고 있던 상황이라 이것마저 거절 할 수 없었다.


루마니아에 처음 도착해서 그의 부모님도 만나고

그의 집도 구경하고, 발렌틴의 부모님이 해주시는 bbq도 맛봤다.

발렌틴은 그 누구보다 bbq, 즉 바베큐 요리를 해 먹는 것 그리고 고기를 굽는 것에

굉장한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에 루마니아 여행 내내 bbq를 먹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한국식 bbq와는 당연히 달랐지만 이건 이거 나름대로 맛있었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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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즐거운 시간들을 보내는 한 편 우리의 싸움은 잦아졌고 강도 또한 하루가 다르게 높아져 갔다.

난 2017년과 같은 마음가짐으로 그를 대했다고 확신한다.

난 비슷한 요구, 부탁을 해왔었고 난 달라진게 없었다. 단지 그가, 발렌틴이 서서히 변하고 있었다.

달리 말하면 이제 우리는 너무 서로를 알아버렸으며 특히 발렌틴은 날 꿰뚫어보고 있었다.

예전의 그가 조금씩 옅어지고 있었으며 잦은 싸움의 끝은 항상 나의 눈물이었다.

내가 울면 쩔쩔매던 그는 온데간데 없고 아예 고개를 돌려버리곤 하는 날들이 일쑤였고

루마니아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의 달라진 반응에 적응 할 수 없던 나는 성숙한 대처방법을 택하지 못하고 더 튕겨나가는 방법을 택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내가 발렌틴의 마음에 생채기를 낼 수 있는 방법은 진부했다.

그냥 집에 간다고 말하는 것. 그것만이 그를 곤란하게 할 수 있을 거라고, 그가 고집을 접고

나에게 지고 들어올 거라는. 내가 믿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유효기간이 굉장히 짧다는 사실은 인식하지 못한 채.


발렌틴은 이제 내 말에 신경도 쓰지 않았고 그 다음 날 아침 내가 아무렇지 않은 척

그에게 다가가는 날들이 조금씩 생겼던 것 같다. 그때부터.


헝가리에서의 날들도 너무 행복하고 즐거웠지만 시작은 유쾌하지 않았던 게 첫날 부터 싸웠다.

아마 난 첫날부터 돌아다니고 싶어서 빨리 나가자고 투정 부린 반면 발렌틴은 쉬고 싶어 했던게

화근이었고 발렌틴은 더 이상 나의 투덜거림에 쩔쩔매지 않았다.


그래서 첫날 부터 부다페스트를 혼자 돌아다니게 되었고,

너무 속상했던 건 첫번째로 발렌틴이 없으니까 혼자 돌아다니는 게 너무 심심했다는 사실.

나 혼자서 신나게 신경 쓰지 않고 잘 돌아다니면 되는 걸 못하고 있는 내 모습을 내가 스스로 봐야했다는 것.


두번째로 소중한 우리의 여행 시간을 허투루 낭비 했다는 것.

소중한 우리의 시간들이 너무 아까웠다.

여느 커플들과 비슷하게 싸우고 화해하고 다시 서로 너무 사랑하다가 또 싸우고 화해하는

반복적인 과정은 여행 내내 지속됐다.


IMG_0425_Original.jpeg 부다페스트는 그래도 너무 아름다웠다.

우린 안타깝게도 여행의 마지막날 까지 싸웠다.

그 이쁜 광경을 앞에 두고 우린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아름 다운 것을 즐기는 행복을

누리지 못했다. 아니, 못한게 아니고 그 기회를 스스로 팽개쳤다.


발렌틴이 먼저 다가오지 않은 채 싸움이 무마되는 경우가 허다했고

아마 이때부터 난 달라진 발렌틴을 느끼고 있었고

발렌틴은 나에게 지쳐가고 있었던 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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