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같이 살기로 결심하다.

동거 할 결심.

by 글너머

발렌틴은 그만뒀던 파이브가이즈에서 매니저로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됐고 나는 한식당에서 일하게 됐으며

한식당에서 이젠 점점 적응해가고 있었다.

물론 자주 싸우긴 했지만 평범하고 평탄하게 우리의 나날들은 흐르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평탄함은 쉽게 지겨워졌고 좀 더 다른 우리만의 시간을 즐기고 싶었다.

시간이 너무 아까웠고 발렌틴과 여행을 최대한 많이 다니고 싶었지만

이래저래 나가는 돈이 많기는 했다. 집 렌트비, 생활비, 교통비, 휴대폰 비 등등.


그때까지 나는 처음 집에서 계속 지내고 있었고(물론 거의 발렌틴 방에서 살다시피 했지만)

발렌틴도 한국 사이트에서 구한 집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매번 같이 지내는데

왜 같이 사는 걸 거부하냐고 발렌틴은 이해 할 수 없어 했다.

물론 문화권이 달라서 생각 차이가 나는 건 인정하지만 이렇게 내가 너희 집에 가든

아니면 너가 내 집에 오든 이러는데 시간 낭비, 돈 낭비 할 바에야 같이 살자고 계속 졸라댔다.

머리로는 나도 같이 살고 싶었지, 당연. 내가 그걸 설마 몰랐을까. 돈이라도 아끼면

우리가 더 많은 경험을 할 기회가 주어지는 데 나라고 그 혜택을 저 버리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내 첫 남자친구, 첫 연인이었던데다가

내가 걔네 집에 가서 얼마나 많은 날들을 지내는지 여부에 상관없이 내 집이 있는 것과

내 집이 없는 건 개념 자체가 달랐다. 이제 모든 생활을 다 같이 해야 한다는 것에 주어지는 부담감은

당연히 컸고 '동거'라는 개념이 주는 무거움이 엄청났다.

나도 같이 살고 싶은 마음을 애써 누르고 있었지만 생각해보니 나는 곧 한국에 돌아가야 했다.

어쨌건 1년도 안남은 시점이었고 장거리 연애가 되는 건 확실해진 시점에서

눈 딱감고 6개월만 같이 살아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면으로 보나 같이 사는게

이득이었던 건 사실이었으니.

그래서 비장한 각오로 발렌틴한테 이제 같이 살 마음이 생겼다고 말했고 그때부터 발렌틴과 나는

적극적으로 같이 살 수 있는 방을 찾아 다니기 시작했다.

사실 말이 발렌틴과 나지 발렌틴이 거의 다 알아봤다.

이미 말했듯이 모든 걸 난 발렌틴한테 의존했고 걔도 그게 당연한 듯이 나를 챙겼다.


그래도 우린 뷰잉은 같이 다녔고, 운이 좋게도 첫 뷰잉을 갔던 집이 굉장히 괜찮았다.

Golders green 역 쪽이었고 central로 가는 버스도 많았으며, night bus도 있고

집 바로 앞에 버스 정류장이 있었다. Waitrose나 Sainsbury(영국의 이마트 같은 곳)도

가까이에 있었던데다가 한국마트, 한인식당도 있고 좋았다!

방도 아주 넓어서 둘이 살기에 적당했고 집도 나름 깨끗했다. 당연 욕실, 부엌은 share해야 했지만

그때의 나에겐 욕실 share도 가능했다. 지금은 절대 상상할 수 없지만.

아마 방이 그 정도 퀄리티에 그 가격이었던 이유는 내 생각으론

바로 앞에 도로가 있어서 밤에 소음때문에 그러지 않았나 싶은데 나와 발렌틴은 그런건 전혀

신경쓰지 않았기 때문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있는 조건이었다.

그리고 살때도 그다지 그 소음으로 힘들었던 적도 없고.


오케이 결정!

그리고 우리는 드디어 같이 살기 시작하게 된다.

이사를 가던 그 날들을 잊을 수가 없다. 그 집을 떠나게 돼서 아쉬움은 정말 솔직히 말하면

그다지 크지 않았고, 그냥 새롭고 좀 더 큰 집으로 이사 가게 된다는 설렘.

또 혼자가 아니라 발렌틴이랑 같이 지낼 거라는 행복감, 안도감.

그래서 나름 그 많은 짐들을 버스를 타고 낑낑 옮기면서도 발렌틴과 함께라서

전혀 문제 없었다. 우리 둘 다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사를 같이 할 수 있는 시간이

그다지 자유롭지 않았어서 밤에만 시간이 났는데도 아마 밤이라서 그런가 더 낭만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버스 내내 '드디어!'라는 마음이 우리 둘 다에게 있었던 탓인지 서로 굳이 말하지 않았지만

우리 둘 사이에는 행복감이 감돌았고 난 그 순간을 충분히 즐겼다.

그 기억이 나에게 한 순간으로 기억 되는 것만 봐도 새롭고 설레는 순간 이었음이 분명하다.


짐도 다 옮기고, 우린 우리 방을 청소하고, 정리하고 옷장에 서로 구역도 나누는 등

같이 살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하나하나 씩 해나가기 시작했고 즐거웠다.

거기에 우리 방은 아주 큰 창들이 3개나 있어서 환기도 잘 되고.

아 이제 행복한 날들만 남았구나. 더 좋은 시간들 많이 보내야지! 그만 싸우고!

라는 생각은 진짜 정말 잠시였다.


난 동거라는게 이렇게 인내심을 많이 필요로 하는지

서로의 생활패턴을 향한 존중이 이렇게 중요했던 건지 그때 깨달았다.

발렌틴이랑 같이 살아서 더 편하고, 돈을 더 아끼고 뭐시기고 다 됐고.

그 때도 이미 많이 싸우고 있었는데 그거 이상으로 싸우는 게 가능하구나 싶을만큼

우린 미친듯이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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