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젊은 날의 우리는 언제나 함께.

볼 꼴 못 볼 꼴 다봤지만 그래도 너니까

by 글너머

행복한 여행 후, 우린 나란히 파이브가이즈를 그만 뒀고 같이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일하게 됐지만,

난 그 레스토랑에서 매니저에게 왠지 모르게 미운 털이 단단히 박혀 해고를 당했다.

워킹홀리데이 시리즈에 더 자세히 쓰여 있어 긴 설명은 자제하겠지만 이 기간동안 난 한없이 약해져 있었고

견딜 수 없는 우울감과 자기비하가 계속되던 시기였다.

급작스런 실업으로 난 한 몇 일간 그렇게 방황했고 충격에서 쉽사리 해어나오지 못했다.

어떻게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거지? 해고를 당한 후 집에 오는 길에 발렌틴에게 호소하다시피

이건 말도 안되는 일이라며 울었다. 그는 자신도 어찌 할 수 없는 일에 무력감을 느끼는 듯 했고

그게 그를 괴롭게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내가 내린 결론은


'발렌틴, 너도 지금 그만 두고 나와.'


내가 잘린 직장에서 내가 사랑하는 남자친구가 날 지독히도 상처준 그들과 같이 일하는 꼴은

보기도 싫었다. 상상만 해도 치가 떨렸고 그때 내가 생각해 낼 수 있는 건 발렌틴도 그 공간에서

나오는 것 밖엔 없었다. 이 화가 풀릴 순 없어도 걔라도 거기서 빼와야 내 억울함이 조금은 덜어질 것

같다는 착각에 빠져 고집을 부렸다. 다행히도 발렌틴은 어른스러웠다.

다 맞는 말이었다. 틀린 구석은 요만큼도 없었고 그는 다정하기까지 했다.


그럼 누가 돈 벌어? 현실적으로 좋지 않은 선택이야. 조금만 참자 우리.

근데 인정하기 싫었고 부정하고 싶었다. 그리고 어리석게도 걔가 그만 두는게 나에 대한 사랑을

증명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의 나에겐 '너가 날 사랑한다면' 앞 뒤 재지 않고 그냥 내 옆에 있어줘야 한단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물론 맞다 틀리다는 없다. 정말 누군가는 그만 뒀을 테지 그게 그녀 혹은 그를 사랑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할테고 이에 있어서 옳다 그르다를 판단할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다.

중요한건 발렌틴은, 내 남자친구였던 그는, 그것이 그의 방식이었던거다. 당장의 해소보다

대비에 더 초점을 맞췄던 그.


쩔쩔매는 그를 난 쳐다보지 않았다. 나도 마음 속 깊이에는 장기적으로 봤을 때 옳지 않은 선택이라는 걸

알고 있었고 이미 설득 당했지만 왠지 모르게 그를 쩔쩔 매게 하고 싶었다. 나란 인간, 참 미숙했지.

그래도 다행히 내 안의 이성적인 면이 얼른 현실을 일깨워줬고 난 마지못해 받아들여야 했다.

발렌틴이 일을 가면 난 그냥 집에 있었다. 다른 job을 찾기도 싫었다. 파이브가이즈 이후에 번번이 실패하는

나를 더 이상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핑계라기엔 그때 받은 충격이 꽤나 셌다.


그러나 나는 job을 찾아야 했다. 부모님께 돈을 빌리기란 죽기보다 싫었다. 워킹 홀리데이 왔는데

내가 나 하나 건사하지 못한다는 인상을 부모님께 드리는건 용납할 수 없었지만....?

아빠가 몰래 나한테 보내준 용돈을 한번 거절 후 사실 낼름 받았다. 그 용돈이 없었다면

상황은 더 최악으로 갔을지도. 물론 부모님께 상황이 이렇다고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렇지만 그때의 런던도 그때의 나에겐 비쌌다.(지금 런던보다는 훨씬 쌌다.)

우리 둘은 돈을 아끼기 위해 가끔씩 우리가 사는 동네에서 센트럴까지 걸어가기도 하고 그랬다.

그렇게 교통비까지 아껴야 하는 상황까지 갔음에도

둘이라서 버텼다.


돈이 없다는 그 압박을 견디는 건 우리를 지치고 무기력하게 했지만 우리에겐 서로가 있었기에

다른건 필요하지 않았다.

같이 걸어다니면 그게 데이트고 Tesco(영국의 마트 이름)에 가서 choco twist 빵 나눠 먹으면

그게 행복이었고, 영국엔 널린게 공원이니까 Hyde park에 가서 싸구려 커피 하나 사서

앉아서 얘기 나누는게 우리의 소중한 시간이었다.


당연히 우리가 돈이 정말 아예 없어서 거리로 나앉고 이런것까진 절대 아니었지만

다른 것에 돈을 쓰는건 사치였다.

그래도 우린 크리스마스도 괜찮게 보냈다. 나름 싸게 식재료 사서 발렌틴 방에서

조용조용히, 발렌틴이 만들어주는 코스 요리와 디즈니 영화들로 소소하게 그러나 알차게 보냈다.


하지만 일을 구해야 한다는 의욕은 쉽사리 돌아오지 않았는데

하루는 발렌틴이 갑자기 은행을 가자고 하는거다. 뜬금없이 은행? 왜?

'우리 엄마가 나 안경이 이상하다고 말했더니 갑자기 돈을 보내줬어.'

근데 그걸 말하는 그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눈물이라곤 아예 보이지 않는데

요상하게 그가 슬퍼보였다.

그는 루마니아 사람이고 루마니아는 상대적으로 부유하지 못한 국가였으며 그도 유복하지 않은

가정의 자식이었다. 근데 엄마는 원래 자식을 향한 사랑에 관해서는 기준이 없어지는 분들이니까.

발렌틴의 어머니는 한달 치 월급을 발렌틴한테 다 보냈다고 하셨고

그 월급은 비참하게도 180파운드 정도밖에 되지 않는, 영국에선 아주 적은 돈이었다.


안 받아도 살수 있었다. 그러나 발렌틴은 받기로 했다. 아니 사실은 받을 수 밖에 없었던 거지만

돈의 액수보다 더 중요했던 건 엄마의 애정이었고 군말없이 받기로 했다.

사실 그 돈을 발렌틴의 생활비에 보탰어도 됐겠지만 그 돈은 오롯이 안경을 사는 데에 썼다.

그 돈의 쓰임새는 오로지 엄마가 말한 '안경 사는데 보태서 써' 에 있었다.


그 날 이후

난 열심히 구직하기 시작했다.

젊은 날의 우리는 언제나 함께였고 말로하지 않아도 같이 발 맞춰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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