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랑 똑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니
오랜만에 소설이 아닌 장르에서 책에 완전히 몰입할 수 있는 경험을 했다.
첫 장을 읽자마자 그녀의 문장에 사로잡힐 수 밖에 없었고 밑줄을 그을 문장들이 수두룩했다.
박찬욱 감독님이 '이토록 솔직하게 쓴 글이라니' 라는 감상평을 남기셨다고 했는데 이에 완전히 고개를 끄덕거렸고, 내가 했던 생각을 이렇게 명확하고 정확한 단어, 그리고 흐름으로 글로 옮겨질 수 있다는 것에
이상한 희열도 느껴졌다.
생각은 할 수 있지만 그 생각을 조리있게 구성해서 하나의 글로 완성시킨 다는 점이 난 작가들만이 할 수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하는데 클레어 데더러 작가의 에세이는 그런 의미에서 완전하게 '작가'였고 단숨에
내 최애 작가가 되었다.
사고를 언어화 시키는 작업은 정말, 매우 어렵기 때문에.
내가 블로그에 어설프게 써놓은 글 들 중 하나가 예술의 역할에 관한 거였다. 내가 생각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남들에겐 말할 수 없는, 사적인 영역에만 담아야 하는, 감정들이나 생각들을 가지고 살아가고 그건 대부분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않거나 좀 더 가면 용납되지 않는 감정들이나 생각들이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들이 그에 갑갑함을 조금이나마 덜 느낄 수 있는 이유는 예술이 그 감정들의 배출구가 되주기 위해서란 생각을 난 했다.
이런 내 생각은 소비자들의 시선에서 전개된거라면 어렴풋하게만 느끼고 있던 다른 단면이 클레어 데더러 작가의 글에 의해서 명확해졌는데 그녀는 그 창작자들의 시선에 대해 말했고 이는 내 생각의 폭을 더
넓혀줬다.
그녀는 <롤리타>, 그리고 작가 나브코프를 통해 기꺼이 감정의 배출구가 되기로 한 작가들의 시선을
말한다.
진실은, 사람들은 온갖 종류의 끔찍하고 쓸모없고 비뚤어진 감정들을 품고 산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나는 페리보트를 탈 때마다 차 열쇠를 배 밖으로 던져 버리고 싶은 이상한 충동에 시달린다. ...
모든 훌륭한 예술가는 명작이 이렇게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자아의 일부를 강탈당해야 한다.
먼저 자신 안에 들어가 둘러보다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 무언가를 가지고 나와 글로 쓴다.
때로 흉악하더라도,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지 않을지라도, 때로 본인을 괴물처럼 보이게 만들지라도 쓴다.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그것이 어딘가 우리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 진실이기 때문이고, 훌륭한
예술가들은 '괴물'이 되는 것을 감수하고 예술을 통해 표현한다.
내가 그렇다고 해서 <롤리타>의 소재인 '아동성애'를 두둔하는 게 절대 아니고 클레어 데더러도 아마 나와 같은 생각이지 않을까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아동성애'라는 소재 이전에 나보코프 작가가 결국 이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본질은 이 이야기를 통해 목소리를 잃은 소녀를 생각하자는 것이다. 나보코프 작가는 여러 겹 아래에 놓여진 이야기의 본질을 가장 효과적으로 독자들에게 가 닿게 하기 위해, 그리고 표현하기 위해 '아동성애'라는 걸 고려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 라는, 필연적으로 따를 의심을 감수한 것이다.
나보코프 작가가 정말 그런 사람인지, 아닌 지는 알 수 없다. 나는 알 수 없고, 우리는 알 수 없으며
나보코프 그 자신도 모를 수 있다.
그 여부를 따지는 건 결국 우리에게 진짜 중요한 것이 아니라 훌륭한 예술은 때로는 모두가 쉬쉬하는 부분을 건드려줄 누군가가 있어야 발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흐름에서 그녀의 책 제목인 '괴물들' 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는데 우린 다 그런 경험이 하나쯤 있다.
너무 좋아하는 연예인이 있었는데 그 연예인의 나쁜 행적을 알게 되고 나서 어쩔 수 없이 좋아하는 걸 애써 그만둬야 했던 때.
예상치 못하게 내가 팬이 된 사람의 '얼룩'을 마주 해버렸을 때. 우린 어쩔 수 없이 그 사람에 대한 애정을 저버려야 한다. 왜? 그 사람은 나쁜 사람이니까.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의 예술을 소비하면 안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힌다.
우리나라에서도 너무 좋아했던 배우가 갑자기 학교폭력의 주동자였다거나,
문란한 사생활로 인기가 폭락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그리고 심심치 않게 보이는 댓글은 '아, 제발 내가 좋아하는 이 배우는 이런 거 없어라. 나 계속 좋아하게.'
클레어 데더러 작가의 경우는 로만 폴란스키 감독이나 우디 앨런 감독이 그녀에게 그런 존재였다.
그들의 예술을 존경하고 사랑하지만 그들의 얼룩은 그들의 예술을 사랑하는 그녀를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클레어 데더러는 또 희미하게 존재만 하고 있던 내 생각을 명확하게 언어화시켰다.
'어떠한 작품이 위대한 작품인지 아닌지는 우리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즉, 우리 감정에 좌우된다.'
'이 문제에 거리를 유지하며 냉담한 태도로 접근할 수 없다. 나는 그 고소인들에게 공감한다.
나도 고발자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여전히 예술을 소비하고 싶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에 앞서 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작품을 소비한다는 것은 두 전기가 만나는 일이다. 예술가의 전기가 예술 감상을 방해할 수도 있고, 수용자의 전기가 예술감상을 다르게 만들 수도 있다. 이는 모든 경우마다 일어난다.'
예술가의 전기가, 어쩌면 얼룩져있을지도 모를 예술가의 전기는 우리의 감상을 방해하지만
나,우리, 즉 수용자의 전기가 예술감상을 방해할 수도 또는, 그 예술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정을 가질 수 있는 것이고 이 모든 경우는 필연적으로 발생하며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오로지 본질에만 집중하면 클레어 데더러 작가의 말에 납득 가지만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본질에만 집중할 수 없고 그는 바로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의 역사는 결국 우리의 시선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린 우리가 사랑하는 예술가를 잃기 싫고 잊기 싫어서 예술가의 전기를 되짚어보기까지 한다.
클레어 데더러는 로만 폴란스키의 예술을 사랑했고 그녀의 양가감정이 휴식할 공간을 마련해주기 위해 로만 폴란스키의 불행한 개인사, 즉 역사로 그의 얼룩을 덮으려는 생각도 했음을 솔직히 고백한다.
그녀가 그의 얼룩 때문에 그의 예술을 저버리기엔 그녀는 그의 예술을 너무나 사랑했으니까.
그렇지만 클레어 데더러는 그렇기 때문에 우린 그런 얼룩진 예술가들을 두둔하고 이해해줘야 합니다! 라고 말하기 위해 이 글을 쓴게 아니다.
단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있다는 걸 말하며 예술을 소비하는 소비자들의 죄책감을 덜어준다. 그렇지만 그녀는 우리보다 뭔가 깨달았다는 권위적인 시선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도 그러하다고 솔직하게 말하며 우리와 같은 시선에서 이를 말한다.
가르치려 하지 않고 단지 솔직하게 말하는 그녀의 문체가 난 너무 좋았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녀는 오로지 이런 예술을 소비하는 소비자들에게만 책임을 전가하는 시스템을 비판한다. 자본주의의 흐름 아래 돌아가는 시스템은 우리가 마음 졸이며 우리 자신을 비판하고 죄책감을 가지는 건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상품들만 내놓는다. 그런 손아귀 안에서 소비자들은 실체 없는 '깨끗한 예술'을
소비하는 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죄책감을 가지며 결국엔 사랑하는
예술에게 등 돌려야 하는 마음 고생을 감수한다. 결국엔 다 소비자의 몫이 되는 것이다.
이런 악순환은 소비자들에게 '얼룩 없는 예술, 그리고 예술인은 존재한다' 라는 명제를 완벽한 참으로
단정짓게 하는데, 사실 인간은 그럴 수 없다.
누구나 다 얼룩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리고 우리는 인간이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것이 있다.
이 책의 끝자락에서 클레어 데더러는 그녀의 친구가 그의 양아버지가 폭력을 가끔 행사했다는 얘기한 에피소드를 들려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친구는 그의 양아버지를 사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그런 것이니까. 사랑도 사랑을 하는 자의 '전기', 즉 역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게 만든 걸 수 있고 누군가에겐 납득 되지 않는 걸 수 있다.
하지만 사랑의 속성이 그렇다. 도덕적인 영역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그런게.
그리고 또 하지만, 그 친구가 후엔 양아버지를 더 사랑하게 될 수도, 덜 사랑하게 될 수도, 아니면 싫어하게 될 수도 있다.
관계는 변하니까. 우리의 역사가 변하고 시간이 변하고, 그럼 관계도 변한다.
'하지만 그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 척 하거나 사랑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는 폴란스키를 사랑한다. 이 사실들이 이상적이지도 않고 때로는 우울하기도 하지만,
우리의 진실임에는 틀림없다.'
관계는 가변적이고 언젠가 로만 폴란스키를 사랑하지 않는 때도, 또는 더 사랑하는 때도 오겠지만 지금의 관계에서는 그녀는 로만 폴란스키(의 예술, 아마도)를 사랑한다.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거니까.
아마 이 책을 만나고 이 책을 사랑하게 된, 이 예술을 사랑하게 된 건 나의 '역사'가 영향을 미쳤다.
누군가에겐 내가 이 책을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봐야 공감을 얻지 못할 수 있다. 그들의 역사와 나의 역사는 다르니까. 그래서 나도 이 글의 첫머리 쯤에 '내가 생각하는' 이라고 '나'의 생각임을 명확히 밝혔다.
클레어 데더러는 '우리'라는 말을 쓰는 것에 매우 민감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도피용 비상구다. 우리는 가볍다.
우리는 개인의 책임을 은근슬쩍 내려놓는 동시에 손쉬운 권위라는 탈을 쓰는 방식이다.'
그리고 나는 이에 완전히 동의한다. 모두의 세계는 다 제각각이다. 0.00000001%라도 다르면 다른거다.
그래서 이 모든 글은 '나'의 생각이다. 매우 많은 부분에 클레어 데더러 작가의 글과 단어에 기댔지만.
그녀의 책 처음 부분에 나오는,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그녀가 결국 말하고자 하는 것의 본질이 가장 잘 담긴 문장을 소개하며 이 글을 끝낸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가 사랑해야 마땅한 것이나 사랑해야 마땅한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
우리는 싫어해야 마땅한 사람들을 계속 사랑한다.
우리는 그 사랑을 스위치 끄듯이 꺼 버리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