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테스|토머스 하디

에인절도 만만치 않게 나쁜 x인데,

by 글너머

<테스>는 아마 내가 읽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너무 오래 전에 읽어서 잘 기억나지 않았던 것도 분명했다.

가끔씩 사람들의 글을 읽으면 <테스> 얘기가 나오길래 한번 다시 읽어봐야지 하고 벼르다가도 이미 읽었던 책이라 그런지 쉽게 손이 가지 않았던 것도 사실.

그러다 내가 애용하는 어플 Substack에 누군가가 테스의 등장인물들에 대해 쓴 글을 보고 급 흥미가 생겨 책장에 쳐박혀 있던 테스를 꺼내 단숨에 읽었다. 그리고 그 필자의 의견에 난 적극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에인절이 어쩌면 더 나쁜 놈이라는.

예전의 소설이라 그런지 역시 여자 주인공을 묘사하는 방식은 맘에 들지 않았다. 풍만한 육체니 뭐니 하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토머스 허디가 그가 살았던 시대에 비해 진보적인 여성관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무능하지만 가장으로서의 권위는 놓치고 싶지 않았던 아버지는 다행히(?)도 폭력적이진 않았고, 테스의 어머니 또한 강제적으로 테스에게 그녀의 희생을 요하지 않는다.

아, 하지만 강제적으로가 아닌게 차라리 테스에게 더 폭력적이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테스의 넋두리와 불평을 다 들어주고 미안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가 아니면 우리 가족은 무너진다라는 인상을 계속해서 뿜어내고 있으니까. 아버지는 그마저도 하지 않지만.

난 테스가 오로지 부모님의 명령에 복종하는 딸이 아니라서 좋았고, 할 말은 할 줄 아는 여성이라 좋았다.

으레 고전 소설에서 마주 할 수 밖에 없는 소극적인 여주인공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결국, 테스는 희생양이 되고 만다. 누구나 예상할 수 있듯이.

알렉 더버빌은 뭐 말 할 것도 없이 인간말종이다. 그래서 알렉은 말 할 가치가 없으니 빼고

에인절이 사실 만만치 않게 나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결국 테스를 사랑함을 깨달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못된 행실이 축소된것만 같은 건 내 기분 탓인가?

나도 어플에서 우연히 마주친 그 글을 읽지 않았다면 이 시선으로 바라보지 못했을까?

에인절은 알렉과는 다르게 테스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듯' 해보인다.

알렉의 행실이 하도 파렴치 하니까 더 대비되어 보였던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순수한 사랑을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건 '조건부'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구나 아무 조건 없이 날 사랑해주는 사랑을 원하기 마련이고 그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 때문에 우린

그런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을 볼 때면 숭고함이라는 감정까지도 느낄 수 있다.

에인절의 사랑은 그와 닮아 보였다. 절대 테스를 재촉하지 않았고, 테스가 준비 될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려주었다.알렉과 다르게

아, 하지만 기다려준거지 테스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았단' 것은 짚고 넘어가야겠다.

결국 그의 닫힌 귀는 테스의 마음을 무겁게만 짓눌러갔고 테스가 그녀의 밝히고 싶지 않았던 과거를 밝히자 에인절의 행동 변화는 가관이다.

아니, 내가 백 번 이해해서 옅은 실망감을 느끼는 것 까지도 오케이다.

그 사건의 주체가 누구였건 간에 그 얘기를 듣자마자 바로 그 사건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을테니까. 특히 그 사건의 주 인물이 나의 사랑하는 감정과 깊이 결부되어 있다면 더욱 그럴테다.

나 같아도 내가 사랑하는 남자가 알고 보니 누군가와 결혼생활을 했던 사람이고 그 생활이 그다지 바람직해보이지 않았다면 약간의 망설임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여기서 더 본질적인 질문으로 들어가본다면 그 이야기를 듣는 주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에

따라서도 망설임의 종류가 다를 것이며 그 망설임의 종류가 다른 이유가 따지고 보면 여자로선 매우 억울한 것이다.

아마 이 억울함은 그 누구의 탓이 아닌, 예전부터 굳혀져 내려온 여자에게만 씌여지는 희한하고 불공평한 시선 때문이리라. 아이를 직접 임신하고 직접 낳는 다는 이유로 왜 여자는 '맹랑'하고 '방탕'하다는 화살을 더 쉽게 받는 걸까?

여자가 사랑하는 남자가 누군가와 과거를 함께 했었지만 남자는 임신을 하고 낙태를 할 수 없다.

생물학적으로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가 누군가와 과거를 함께 했었고 그 여자는 임신을 했고 낙태를 해야 했다.

생물학적으로

여자인 나도 이 두 문장을 누군가에게 듣는다면 밑의 문장을 더 심각하게 여길 것 만 같다는 생각에

난 내가 실망스러워진다.

여튼 다시 얘기로 돌아와보면 에인절의 실망감만 놓고 보면 성별에 관계없이 자연스레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고 치더라도, 내가 열이 받는 건 그의 과거이며 내가 위에서 열불을 낼 수 밖에 없던 것과 결을 같이 한다.

에인절은 말한다, 자신의 과거도 방탕했다고. 하지만 이제 새 출발을 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새 출발은 '순결한' 여자와여야만 했다. 왜? 새 출발이니까.

자신은 그렇지 않아도 나와 함께 하는 여자의 '순결'은 마치 완벽한 새 '출발'을 보장하기라도

해 주는 것처럼.

그 후, 에인절에겐 테스에 대한 순수한 사랑은 남아있지 않았다.

간밤의 낭만 넘쳤던 미래 계획도 온데간데 없었고 어떻게 해야만이 사람들에게 티 나지 않게 별거할까만이 그의 최대 관심사였다. 말로는 테스의 체면을 위해주는 척 하지만, 진짜?

에인절은 자신의 체면이 무너지지 않는게 제일 중요했다.

내가 감히 예상하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스와 함께 했더라면 테스는 체면이고 뭐고 그녀 자체로

이미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물론 그때의 시대상을 무시할 수 없기에 테스도 자신의 남편을 욕보였다고 생각하고 난 그런 테스가 답답하면서도 안쓰러웠다. 잘못한 게 없는데 잘못을 자기 자신으로 돌려야 한다니, 이게 뭐냐구.

소설의 후반부쯤에는 그녀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진실했음을 느끼고 에인절은 테스를 찾아간다.

그리고 테스는 그런 에인절을 받아들이고,

이게 말이야 방구야.

물론 이들의 애절한 재회는 알렉이라는 질 나쁜 놈 덕에 결국 테스에게 조금의 행복도 용납하지 않고

아스라지지만.

내가 이 대목에서 느낄 수 있었던 건 에인절이 '받아주는' 사람이 되는 쪽이라는 것에서도 인상이 찌푸려졌다. 자기가 관용을 베푸는 포지션으로 교묘하게 들어가서 '테스'의 과오에도 불구하고 널 사랑하니 난 너에게 돌아왔다 꼴이라니.

내가 만약 테스의 친구라면, 그리고 지금 그들의 곁에 있다면 테스를 내 뒤에 숨기고서 에인절에게

꽥꽥 소리지를테다.

너 혼자 잘 먹고 잘 살라고.

테스는 내가 데리고 살면서 너보다 훨씬 나은 남자 만나고 떵떵 거리며 잘 살거라고.



6e74437f78d60e86b228778ccaa6c6eb.jpg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괴물들| 클레어 데더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