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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타키타니| 이치가와 준

고독은, 결국 존재한다.

by 글너머

나도 나이를 먹어가면서 계속 깨닫게 되는 게 있었다. 인생은 결국 혼자라고.

누군가는 나보고 염세주의라고 했고 누군가는 나에게 동의했으며 누군가는 고개만 작게 주억거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각자의 생각은 다 다르겠지만 그래도 인간에게 고독이란 결코 배제할 수 없는 것이란 건 역설적이게도 인간이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오는 숙명일까.

이 영화에는 파란색이 넘실거린다. 이 넘실거리는 파랑 속에서 감정이 빠진 목소리로 난 외롭지 않다고 말하는 토니 타키타니가 그 중간에 서서 우리의 고독을 대변하고 있다.

원래 모쏠들이 더 외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 건 아직 누군가와 일대일로 내밀한 연인간의 '사랑'을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탓일테다. 사랑의 종류는 다양하지만 연인과 나눌 수 있는 사랑은 또 다른 차원이니까.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나의 고독은 또 다시 역설적이게도 사랑이라는 것으로 메꿔지며 고독이 존재했음을 느끼기 시작한다. 토니 타키타니 역시 그랬다. 그의 삶이 그랬고, 그저 그렇게, 주어진 대로 살아왔던

토니의 삶. 부모님의 부재가 토니에겐 좀 더 고독이 뭔지 늦게 배워야 했던 이유였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불쑥 들어와 버린 사랑은 순식간에 토니에게 '같이' 라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건지 느끼게 해준다. 사랑이 이토록 매섭게 따뜻하다.

에이코와 결혼을 하게 된 이후로 토니의 삶에 고독은 조금씩 자취를 감추는 듯 했다.

에이코 역시 행복한 듯 보였다. 아니 행복했다. 그러나 행복감의 충족이 곧 고독을 상쇄시켜주지 않는다.

우린 보통 이를 인과적인 관계로 생각하곤 하며 그러기 쉽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단 건 혼자 있지

않는 단 거고 고독이 들어차있을 자리에 나에 대한 사랑을 담뿍 담고 있는 누군가가 자리한다면 고독이 설 자리가 없다고 생각하는게 보통의 논리니까.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고독과 사랑은 별개다. 적어도 이 영화에서의 에이코에겐 그랬다.

행복한 결혼 생활로 토니의 고독은 채워지는 듯 했으나 에이코의 고독은 채워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옷을 끊임없이 구매한다. 그녀는 사실 토니와 결혼하기 전부터 그녀의 고독을 그런 식으로 메꾸고 있었고 문제는 결혼생활 이후에도 그게 이어져 왔단 것.

옷을 쇼핑하고 돌아와 파란 빛이 잠식한 화면 안에 그녀가 맥없이 침대로 풀썩 눕는 장면은 꽤, 아프다.

결국은 토니가 아내에게 조심스럽게 옷을 너무 많이 구매하는 것 같다고 말하는 것은 곧 당신 너무 외로운가봐- 였다. 그러나 토니는 정작 아내에게 자신의 말이 그렇게 들렸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한다.

토니는 에이코에게 옷이 뭘 의미하는지 몰랐으니까.

옷을 구매하는 건 마음 속에서 끊임없이 부유하는 고독을 공허하게나마 땜질하려던 그녀의 몸짓이었던건데. 그녀가 토니와 데이트하던 시절, 옷이 마음 속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것 같다며 조심히 고백하던 그녀의 목소리를 토니는 잊었던걸까.

비극적인 사고로 그녀가 토니를 떠나고 다시 고독과 마주하게 된 토니는 이를 견딜 수 없다. 사랑을 겪어봤으니 더 괴로운 것이다. 그리고 결국 그는 그녀가 남겨 놓고 간 고독의 흔적, 옷들을 입고 그의 일을 도와줄 수 있는 어시스턴트를 찾기 시작한다.

조건은 단 하나, 그의 아내와 똑같은 신체 사이즈여야 한다는 것.

그녀의 신체 사이즈와 거의 비슷한 사이즈를 가진 여인 히사코는 출근 하기 전 에이코의 옷장을 둘러 보게 되고, 그녀는, 운다. 황홀해 할 줄 알았던 관객들의 기대를 철저히 배신하고 히사코는 이렇게 예쁘고 많은 좋은 옷들을 본 적이 없다며 운다.

예쁘고 많다 라는 형용사가 고독의 크기를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 같은건 나만의 착각일까.

단지 숫자로만 그녀의 상실을 대체 하려던 토니는 그것이 헛되다는 걸 깨닫고 그녀의 옷을 결국 다 버리게 된다. 이제 모든 걸 정리한 그는 비로소 완전한 혼자가 되고 다시 밀려오는 고독에 기꺼이 휩쓸린다.

에이코의 흔적이 철저히 사라진 드레스 룸 안에서 옹송그린채.

에이코에게 고독의 탈출구란 옷이었고 옷은 그녀 위에 얹히는 동시에 그녀를 가두는 감옥이 되었으며

그래서 그녀의 드레스룸은 감옥.

그녀의 고독을 대변했던 감옥 안에서 토니는 갇혔고 이는 영화 초반에 나오는 토니의 아버지가 감옥에서

외로움을 마주하며 몸을 움츠리고 있는 모습과 오버랩된다.

사랑이 있기에 고독이 존재하고, 고독의 존재로 사랑을 깨닫는다.

또한 사랑이 있더라도 고독은, 언제나 존재한다. 사랑은 상실될 수 있는 것이기에.

*아무 정보를 모르고 봤던 영화였는데도 불구하고, 이거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아니야? 했고 역시였다.

재즈부터 해서 주인공이 너무 무라카미 하루키를 닮아서 처음에 착각까지 했을 정도였는데 역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영화화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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