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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니셰린의 밴시|마틴 맥도나

다정합시다, 우리.

by 글너머

봐야지 봐야지 하고 별렀던 영화가 이미 수없이 많지만 이 영화는 정말로 꽤 벼르고 있었다.

유튜브를 보는데 유병재도, 장도연도 너무 좋았던 영화라는 말에 기대감을 갖지 않을 수 없었던 것도 사실.

좋은 영화라고 하면 각 잡고 봐야할 것 같은 마음에 피곤하다는 핑계로 계속 미루고 미루다가 결국 드디어 어제 봤다.

꽤나 신선한 시작점이었다. 갑자기 절교를 당해(?)버린 파우릭과 결연히 절교를 선언해 버린 콜름.

영문도 모른채 연이 끊겨버린 파우릭은 아마 콜름을 매우 좋아했지 싶다.

그와 멀어지고 싶지 않던 콜름은 미련을 놓지 못하고 계속 그의 눈치를 살피며 그의 마음을 다시 찾기 위해 그에게 말도 걸어보고 나름 노력을 하지만 돌아오는 건 한번만 더 말을 걸면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버리겠다는 협박과 차가운 시선뿐 예전의 그들로 돌아갈 수 없었다.

이유는 없었다. 단지 '무의미함'이 싫어서라는 것.

파우릭이 뭔가를 잘못한 것도,실수한 것도 없었다. 얼마 남지 않은 그의 삶에서

콜름이 생각하는 '무의미함'에 관련된 모든 것들을 이제부터라도 그의 인생에 들여놓고 싶지 않았던 것.

그러나 영문을 모르는 파우릭은 콜름을 친구로서 너무 좋아했기 때문에 쉽게 놓을 수 없다.

이니셰린의 밴시를 보고 내 생각을 나름 정리했다가도 이 글을 쓰기 전에 궁금함을 너무 참을 수 없어 이동진 평론가의 '이니셰린의 밴시' 평론 영상을 아주 살짝 봤다.

역시, 왜 콜름이 그의 손가락을 잘랐는지 같은 행동의 이유를 이동진 평론가의 관점에서

알 수 있었고 감상 경험이 더 풍부해졌지만 이 글에선 오롯이 내가 봤을 때의 감상평을 남기고 싶기 때문에 내가 가장 주목했던 걸 말하면 '다정함' 이었다.

콜름이 파우릭에게 선언한 '절교', 즉 '인연의 단절'은 양방향일때보다 일방향일때가 훨씬 더 가슴아프다. 게다가 이유라도 있으면 모르겠는데 이유도 없이 '그냥' 이라니.

그 사람이 그렇게 결정한 사항이니 이성적으로 보면 내 쪽에서 할 말은 없지만서도 솔직히 그다지 바람직한

행동은 아닐테다. 인간적으로.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우릭이 절대 놓지 않는 건 바로 '다정함'이다.

그렇게 무시를 당하면서도 그는 다정히 그에게 다가서고 다정히 눈치를 살핀다.

물론, 콜름에 한정해서만이 아니라 파우릭은 그냥 원래 '다정한' 사람이다.

여동생이 가축은 절대 집 안에 들이지 말라고 했지만 애완 당나귀 '제니'가 밖에 있는 것이 안쓰러워 집

안에 들이고, 마을 이니셰린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무시하고 싫어하는 도미닉에게도 유일하게 그의 말을

들어주고 아버지에게 폭력을 당한 도미닉을 저녁 식사에 초대하기도 한다.

다정한 사람은 타인의 '다정함'을 훨씬 더 잘 알아챌 수 있다.

직접 다정함을 베풀어본 사람만이 그 '다정함'을 행하기 위해 어떤 마음을 가졌는지 알기 때문에.

그래서 그렇게 냉랭하던 콜름이 경관에게 맞은 파우릭을 데리고 잠깐의 다정함을 보여줄 때가 있는데

그때 우는 파우릭을 보면서 난 영화속에 들어가 파우릭을 토닥토닥 해주고 싶었다.

그 또한 다정함이 매우 고팠던 것일까.

결국 끝에 가서 (의도치 않았지만) 파우릭의 소중한 무언가를 앗아간 콜름에게 파우릭은 콜름의 집을 태우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콜름의 곁에서 항상 콜름의 곁을 지키는 강아지가 있었고 그 강아지 또한 콜름에게 한없이 다정한 존재였다.

콜름이 손가락을 자르려고 할 때마다 그를 귀신같이 알아채고서는 자르는 기구를 숨기려고 했던, 그런

다정한 강아지.

그리고 그런 파우릭은 집을 태우기 전 강아지를 데리고 나오며 말한다.

"넌 콜름에게 남은 마지막 다정함이었으니까 불에 탈 수 없지" 하고.

다정함은 파우릭에게 있어서 그렇게도 필수적인 것이다.

파우릭과 콜름 말고도 주변인물들의 모습은 더욱더 '다정함'의 당위성을 확인시켜준다.

파우릭의 여동생 시오반은 억척스러워보이지만 그 누구보다 그의 오빠를 아끼고 또 매우 똑똑하다.

그러나 그녀는 외롭다.

해소되지 않는 외로움 덕에 그녀는 괴롭기만 하다.

도미닉은 남들에게 매번 핍박만 받는 인물이다.

그 중에서도 자신의 아버지가 자신을 학대하고 그 누구보다 마음이 많이 다쳐있을 인물.

그의 언행과 행동은 필터를 거치지 않은 듯 하며 매우 거침없어서 오해를 받기 쉽지만, 조금만 귀 기울여 들어보면 그 누구보다 제일 순수한 진심을 매번 말하고 있는 도미닉.

하지만 그런 그를 알아주는 사람은 몇 없었다.

영화 후반부쯤엔 콜름의 다른 친구를 질투해 친구에게 거짓말을 한 파우릭을 보고 '파우릭은 안 그럴 줄 알았는데' 하며 세차게 등을 돌리는 그를 보고 있으면, 조그만 거짓말도 용납할 수 없는, 그는 티 없이 순수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그런 도미닉이 넌지시 그의 마음을 시오반에게 고백할 때 나를 아무도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던 시오반의 얼굴이 환하게 피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 모두가 다 버둥대며 살아가지만 사실 누군가에겐 저렇게 사랑고백도, 칭찬도, 관심도 받고 싶은거구나 싶어서.

그리고 시오반은 섬을 떠난다.

그래서, 도미닉에게 남은 건 없었다.

그래서, 난 도미닉의 죽음이 자살일거라고 확신한다.

그렇기 때문에 파우릭의 '다정함'은 끝까지 지켜야 할 어떤 것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삶에 놓쳐서는 안 되는 것.

사랑과 다정함.

'다정함'이라는 제일 강력한 무기를 안고 살아가는 파우릭은 그래서 마지막 장면에서

당당히 걸어갈 수 있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던 콜름과 달리.

다정합시다, 우리.

*시대적 배경이 1923년인데다가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본토를 계속 얘기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아일랜드의 역사적 상황과 파우릭 그리고 콜름의 관계가 아일랜드의 역사적 배경과 관련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를 생각하면서 보면 더 의미있는 영화 감상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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