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원래 사귀는거 이런거 맞죠?

행복했다가 슬펐다가. 안도하고, 불안하고.

by 글너머

그는 날 여전히 사랑했고 난 그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지만 나를 대하는 태도와 관점은 여실히 달라져 있었다. 그 누구보다도 그걸 잘 느낄 수 있었던 나는 그 사실이 짜증났지만 이상하게도 슬프지가 않았다.

그땐 그가 날 떠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던 걸까?

물론 '우리 정말 헤어지겠구나' 라며 진지하게 생각했던 순간들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건 잠깐의 감정일 뿐이었고, 그를 떠보는 수단 일 뿐이었다.

그에게 말로 전하지 않아도, 내가 헤어지겠다고 결심 하는 것만으로도 그를 상처 줄 수 있을 것 같았고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은 곧 우리의 관계추가 예전처럼 아주 확실히 나한테 기울 수 있다고.

난 그렇게 생각했다.


헤어질 생각은 애초부터 하지 않았다. 난 그를 못 놨고, 그도 나를 못 놨다.

서로의 행동을 그렇게 못 견뎌하면서도 꾸준하게 화해하고 끈덕지게 붙어있었다.

헤어짐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고 내 의지만으로 되는게 아니란 것,

헤어짐이란 단순히 의견 충돌의 반복, 서로를 향한 실망을 넘어서는 그 무언가가 있어야 했다.

이것도 물론 이제 와서야 알게 된 거지만 그땐 어렴풋이 우리가 헤어지지 않을 거라는 걸 느끼고 있었고

내가 아무리 막 나가도 그가 날 잡을 거란 걸 어느 정도 알고 있어서 막무가내로 행동했던 지도 모른다.

그도 아마 그러지 않았을까?


조금은 달라진 그 였지만, 그래도 '그' 였다.

'다정' 이 디폴트 값이었던 걔는 라이프 스타일이 나랑 안 맞는 다는 것 빼곤 날 넘치게 사랑해줬으니까.

또 이 시기 즈음에 내 동생이 영국으로 놀러왔었다.

물론 나는 동생과 시간을 많이 보내고 싶었지만 그 때 길게 오프를 신청 할 수가 없었던게

오프 slot이 꽉 차 있었고 어쩔 줄 몰랐던 나를 또 발렌틴이 구원해줬다.

구원이라기엔 거창한 감이 있지만 발렌틴은 내 동생과 같이 시간을 보냈다.

아무래도 나보다 좀 더 시간 사용이 자유로웠던 그는 내 동생을 나보다 잘 챙겨줬고

내 동생은 영어를 한 마디도 못했는데 둘이 어떻게 어떻게 의사소통을 했나보다(?).

어느새 둘은 엄청 친해져 있었고 내 동생이 발렌틴을 너무 좋아하는게 느껴저서 괜시리 뿌듯까지 했다.


또, 내 일도 안정되고 발렌틴도 다시 파이브가이즈에 들어가 Assistant 매니저 일을 하면서 안정되어 갔고

rent 비까지 아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여행을 안 갈 이유가 없었다.

우린 포르투갈을 여행했는데, 물론 가는 길에도 싸웠지만 여행지에 도착해서의 설렘은

임팩트가 그 어떤 것보다 커서 서로를 향한 섭섭한 감정을 리셋시키기에 충분했고 행복한 여행을 즐겼다.

물론 중간중간에 크고 작은 싸움은 항상 있었으나 섭섭한 마음도 잠시 또 여행 그 자체는 너무 좋았다.

IMG_1771_Original.jpeg 아름다운 나라, 포르투갈.

우리 엄마는 가끔씩 나에게 워킹홀리데이 2년을 다 채우고 온게 제일 아깝다고, 1년을 낭비했다고

아직도 종종 말씀하시곤 하는데 난 물론 토를 달지 않지만 사실 나에겐 굉장히 소중한 1년이었다.

이렇게 말하는게 매우 진부한 표현인 걸 알고 있지만 정말로 내 젊은 날의 아름다운 기억, 페이지를

장식해줬고 난 그 기억과 그 과거들을 반추하며 살아가니까.

날 삽시간에 아련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기억이 있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여행 가는 것에 훨씬 더 적극적이었던 나는 이미 머릿속으로 다음 여행 계획을 짜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나의 비자 만료 날짜는 서서히 다가 오고 있었고 맘이 급했다.

더 가치있는 우리의 시간의 확보가 간절했다.

하지만 내가 떠나기 전 이 포르투갈 여행이 마지막이 되어버렸다.

모르는게 약이라고 이게 마지막 여행일 줄 알았다면 아쉬움에 제대로 즐기지 못했을텐데

차라리 잘 된건가 싶다.


이제 나의 비자 만료가 약 6개월 남은 시점이었고 그 6개월은 생각보다 빨리 흘러갔으며

우리가 장거리 연애를 마지못해 선택해야 할 그 순간이 조금씩 조금씩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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