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결국은 헤어질 때가 오고 말았다.

그때의 순수했던 너.

by 글너머

내 비자 만료는 2019년 1월 쯤 이었지만 나와 발렌틴은 시간이 흐른다는 생각 없이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사랑하고, 열심히 싸웠다.

난 끊임없이 화냈고 끝 없이 용서했으며 나만의 방식으로 그를 아껴줬고,

발렌틴은 꾸준히 내 부탁을 무시했고 부단히도 날 사랑해줬다.

우리 둘은 이제 막 2년차 커플이 되어가고 있었고 만난지 꽤 길지 않은 시간 치고는

서로를 너무 다 알아버렸다. 아무래도 사귀기 시작 한 이후로 우리 둘은 거의 한번도

떨어져 있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게다가 정말 볼 거 못 볼 거 안 본 사이였기 때문에 어느 포인트 이후로는 '이건 애증일까' 싶었다.

그렇다. 애증.

애증은 내가 발렌틴을 향해 쏟아붓는 모든 감정의 결들을 함축하고 또 함축하여 담아낼 수 있는

단어이지 싶다.

그를 사랑하지만 미웠다. 싫은게 아니라 미웠고, 그를 향한 애증의 '증' 또한 사랑에 기반한 것이었다.

난 너를 계속 사랑하고 싶고, 근데 너가 계속 이러면 난 널 미워하게 되고, 계속 미워하다가 내가

널 정말 싫어해야 될 때가 오는게 두려우니, 제발 바뀌어 줘.

난 정말 이 마인드였다. 내가 널 사랑하니까 널 바꾸고 싶었다. 그때는 나의 고집이 발렌틴의 아집을

더 강하게 만드는 촉매제가 되는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싸움은 싸움이고,

우리 둘은 어쨌든 시간이 맞을 때마다 집에서건 밖이건 좋은 시간들을 보내려고 노력했고

발렌틴은 내가 일하는 식당의 매니저 언니 오빠와도 친해지고 내 동료들과도 친해져서

같이 밥도 먹고 술도 마시며 좋은 인연들을 함께 만들어나갔다.

크리스마스가 점점 다가오는 시점이었기 때문에 우리 둘은 소박하게 크리스마스 트리도

조그만 걸 하나 사서 꾸미기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되게 평범하게, 내가 곧 떠나야 한 다는 사실은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그리고 소소하게

우리는 2018년 겨울을 행복하게 보냈다.


그렇지만 12월이 되자, 크리스마스는 크리스마스고 이제 정말 1달이 채 남지 않았던 우리의 시간.

어디라도 가야겠다 싶었다. 더 이상 소박하게는 그만하고

난 우리 둘이 런던의 우리가 사는 방 말고 다른 곳을 가고 싶었다.

그렇게 우리는 12월의 끝자락, 크리스마스 직전에 브라이튼을 놀러갔다.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브라이튼에서 보는 겨울 철의 바다는 왠지 모르게 암묵적으로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쓸쓸함의 밀도를 한층 높였다.

그리고 그는 한 식당에서 수줍게 무언가를 건넸는데, 에어팟 1세대 였다.

그때 에어팟이 막 유행하던 시기라 은근 부러워하던 나를 걔는 이미 신경쓰고 몰래 사서 선물을 샀던 거다.

난 그때까지 꾹 꾹 참고 있던 눈물을 펑 하고 터뜨렸다.


서로 교환한 크리스마스 선물

걔는 그런 애였다. 에어팟이 중요한게 아닌 거, 이미 내가 우는 이유가 에어팟이라서가 아닌거

다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진짜 '마음'을 받아본 사람이라면.

발렌틴이 에어팟을 내 선물로 결정한 이유부터 해서 나에게 주기까지의 과정에 그의 마음은 모든 구석구석

꽉꽉 들어차 있었으며 그의 이 선물에 담긴 마음이 불순물 하나 없는 순정 그 자체여서.

난 너무 많이 울었다. 그 때 현실감있게 다가왔다. 내가 그를 당분간 못 본다는 그 사실이.

잠시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단순한 사실을 넘어선, 나한테 그득히 항상 사랑을 주곤 했던 이 버팀목같은

이 사람의 얼굴을 못 보는구나. 라는 생각이 그때 팅- 하고 내 머리를 쳤다.

그 이후 나는 울지 않았다. 적어도 브라이튼 내에서는 울지 않고, 그 시간을 충분히 만끽했다.


브라이튼에서 다시 런던으로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사진들을 보면서도 나 혼자 찔끔찔끔 울었다.

발렌틴이 찍어준 내 사진에는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날 향한 애정이 깃들어 있는게 느껴졌고,

난 그래서 혼자 몰래, 발렌틴 잘때 조금씩 울었다.

이제 내가 한국으로 다시 떠나야 할 날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발렌틴이 애써 외면하는 듯해서 난 더 슬펐다.


PS. 이 글 쓰면서도 펑펑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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