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깜짝으로 그를 찾아갔다.

아직도 설레는 기분.

by 글너머

발렌틴이 떠났고 찝찝한 기분보다 더 앞서서 내 마음을 장악해버린건 공허함이었다. 그 찝찝함이란건

그 때에는 내가 괜히 오버해서 생각하는 걸거야 라고 생각 할 수 있는 정도였다.

난 발렌틴이 가고 나서 한 2-3일 정도는 무기력 해져 있었던 것 같다. 축 축 늘어지고 아무 것도 하기 싫고

다시 영국으로 얼른 가고 싶고. 그때는 난 한국에서 살지 못한다 라는 마음이 더 그득 그득 했던 때라

발렌틴이 있고 내가 살고 싶은 그 영국으로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건 안전하게 졸업하는 것과 석사 준비.

그리고 12월에 난 발렌틴을 만나러 가기로 마음 먹었다.

발렌틴에게도 12월 중에는 갈 거라고 미리 귀띔은 해놨었고.


그래서 난 곧바로 아르바이트를 빠르게 찾기 시작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그때 영어밖에 없었으니

영어학원에 월수금 풀로 선생님 아르바이트를 내가 생각했을 때 꽤나 괜찮은 페이로 찾게 됐고 열심히

일을 하기 시작했다. 제일 아쉬운 건 이때 아르바이트 말고 내 경력에 도움 되는 인턴이라도 찾아서 좀

해놓을 걸, 하는 것이다. 그때까지도 뭔가 회사에 지원 해서 인턴 생활을 시작 하는 것 자체가

사회 생활을 시작하는 것만 같아서 두려웠나보다.

난 학교를 다니면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생활에 빠르게 적응해 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시작은 고됐다.

애들이랑도 친해져야 했고, 아이들의 커리큘럼도 다 따져봐야 했고, 부모님한테 전화도 돌려야 하는 등.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꽤나 있기는 했지만 적응 되니까 그것도 할 만 했다.

난 그렇게 발렌틴을 만나러 가기 전까지의 4개월을 견뎠던 것 같다.


발렌틴이랑은 그 이후 당연히 연락을 주고 받았고 발렌틴도 역시나 한국 여행의 후유증을 쉬이 벗어나지는

못하는 듯 했다. 더 중요한건 내가 미묘하게 지울 수 없던 그 찝찝함은 조금씩 자취를 감췄는데 물론

발렌틴이 애정표현을 계속 한 것도 있었지만 그는 그 시기에 이사를 결심했다. 내가 한국으로 떠난 이후

같이 살게 된 친구, 그리고 파이브가이즈에서 같이 일하는 2명의 친구들과 같이 아예 하나의 집을 계약

하기로 결정한거다. 이런 계약은 영국에서 흔히 보이는 유형인데 아무래도 집값이 너무 비싸다 보니

친구들 몇명을 모아서 집을 하나 통째로 계약 하게 되고 물론 관리비 같은 것들을 다 관리해야 되는 불편한

점은 있을지 몰라도 모르는 사람들과 집을 쉐어하는 것보단 훨씬 심적으로 편하다는게 가장 큰 장점.


그는 꽤 고생했던 것 같다. 아무래도 제일 괜찮은 조건의 집을 찾으려면 발품을 많이 팔아야 하기도 했고

발렌틴 포함 4명이 합의해야 하는 사항들이 여러가지 있었을테니 그는 가끔씩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를 버틸 수 있게 했던 건 그는 이미 내가 석사로 내년에 올 거라는 걸 전제해두고 나도 같이 들어와 살 집을 찾는 다는 것이었다. 굉장히 확고한 그의 결심에 난 자연스레 내가 가지고 있던 그의 감정에 대한 의심을 지울 수 있었다.

아직도 그의 미래엔 내 존재가 굳건히 자리 잡고 있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었던게 사실.


다행히도 wembley 쪽에 괜찮은 집을 하나 구하게 됐고 발렌틴은 그 쪽으로 이사를 갔다.

이사를 가기 전 날 그는 텅 빈 방을, 한 때 우리의 방이었던 그 방을 비디오로 쭉 찍어서 나에게 보내줬다.

그 비디오를 찍고 보내주던 그도, 그 비디오를 받아봤던 나도 괜시리 마음이 찡해졌더랬다.


발렌틴이 보여준 새 집은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좋았는데 1층에 방 3개는 그 친구들이 각자 나눠 쓰고

2층은 나랑 발렌틴만 살수 있는 공간으로 마스터 베드룸같이 굉장히 방이 컸으며 큰 창도 천장에 있어서

햇빛을 잘 받을 수 있었고 무엇보다 욕실이 딸려 있는게 제일 좋았다.

욕실 안에는 자쿠지도 있을 만큼 나름 큰 크기였어서 난 벌써부터 그 쪽에 들어가 사는게 기대가 되었다.

물론 위치는 조금 걱정 됐던게 무조건 tube 그러니까 지하철만 탈 수 있는 위치였어서 지하철 파업이라도

하는 날에는 굉장히 불편할 조건이었지만 그때는 나한텐 너무 먼 얘기였으므로 그런 걸 고려할 겨를도 없었고

내가 발렌틴이 이사하는 과정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했는데 불평하는 것도 말이 안됐고.


발렌틴도 이사를 하고, 나도 돈을 벌고.

그렇게 그렇게 어물쩍 몇개월이 지나고 드디어 12월이 도래했다.

난 크리스마스가 오기 몇 일 전으로 비행기 표를 예약해놨고 발렌틴에게 12월 언젠가 갈거라고만

해놨다. 드디어 떨리는 마음으로 도착한 런던.

오랜만의 런던도 런던이지만 이미 발렌틴을 곧 볼 생각으로 너무 설렜다.

발렌틴은 내가 온 걸 알지 못하니까 나 혼자 우버를 타고 발렌틴 친구가 미리 나에게 알려준 주소로 집을 찾아가야 했고 다행히 잘 도착할 수 있었다.

이미 발렌틴이 오늘 일도 안가는 걸 확인했고, 이제 서프라이즈로 그의 눈 앞에 등장만 해주면 끝!


아직도 그 순간을 생각하면 너무 기쁘고 행복하다. 집의 창문을 통해 내가 걸어오는 모습을 본 그의

환하게 웃는 얼굴을 마주했을 때의 기분은 굉장히 짜릿한 것이었다.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는 것도 좋지만 내가 그 선물을 주는 것 또한 더할 나위 없이 기쁜 것이라고.

버선발로 달려나오는 그를 보며 나를 꼬옥 안아주는 그를 보고 난 내가 그 전에 의심했던 건 역시

아니었다고 속으로 다시 한번 생각했다.


아직 사랑하고 있을 때는 무시 되는 감정들이 있다. 그리고 그 무시된 감정들은 감정적으로 비참해지는

때에 생명력을 언젠가 스스로 얻어서 다시 마음 안에 커지곤 하는데 그 생명력들은 보통

'내가 그때 느낀게 맞았네, 내 촉이 틀리지 않았어' 로 표현 되곤한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니었고 의심의 불씨는 이미 꺼진 지 오래 됐기 때문에 그때는 내 감정에 충실하면

됐다. 내가 느낀게 거짓이 아니었네 하는건 그때 그 순간 전혀 필요 없는 것으로 느껴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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