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은 존재한다.
나와 발렌틴은 각자의 자리에서 시간을 보냈다. 발렌틴이 뭘 하고 있었는지는 당연히 지금도 알 길이 없지만
아마 그때 생각 정리중 아니었을까.
어스름한 오후가 되어서야 내가 연락했는지 발렌틴이 먼저 연락했는지는 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화해 아닌 화해를 하고 길을 나섰다. 그러나 보통 화해하고 다시 러브 러브 모드로 돌아갔던 평소의 우리와는
아니 평소의 발렌틴이랑은 조금 달랐다. 좀 당황했지만 자존심을 굽히기 싫어 나도 신경 쓰지 않는 척 했다.
발렌틴은 친구들을 위해 한국에서 사온 선물인 티가 팍팍 나는 선물을 사고 싶어했고 우린 인사동으로.
인사동에서 기념품을 쇼핑하고 간단히 술 한 잔하러 분위기 좋아보이는 와인바 같은 곳을 들어갔다.
나는 술이 조금 들어간 이후부터 발렌틴의 마음을 조금씩 떠봤는데, 뭔가 걔가 이상했다.
왜 진짜로 나랑 헤어질 마음 먹은 것처럼 행동하는 건지. 원래 우린 이렇게 싸워왔는데, 얘가 갑자기
왜 이러는지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원래 같으면 내 속셈을 다 알고도, 내가 떠보는 거 다 알면서도
스리슬쩍 넘어가주는게 발렌틴이었는데 그 때에는 그렇지 않았다.
'내가 아까 말했잖아 헤어지자고, 나 진심이야. 영국 다시 돌아가면 헤어지는 거라고 생각하자'.
같은 최악의 시나리오로 흘러갔을 만한 말은 다행히도 하지 않았지만 무미건조한 반응이 나는 더 불안했다.
우린 똑같이 장난쳤고 똑같이 편한 친구마냥 같이 시간을 보냈지만, 찝찝한 마음을 거둘 수가 없었다.
미묘하게 냉담했던 그의 태도. 얘 정말 나한테 많이 실망했던건가?
텁텁한 기분을 뒤로 하고 맞이한 다음 날. 우리 엄마는 발렌틴 마지막날이니까 맛있는 걸 먹이겠다며
발렌틴이 제일 맛있다고 했던 유명한 돼지갈비집을 가자고 제안했고 우린 정말 맛있게 마지막 식사를
같이 했다. 식사는 맛있었지만 은근하게 슬픈 분위기가 감돌았다. 우리 엄마는 몰라도 나는 맘이 안 좋았고
발렌틴도 평소와 다름없어 보였지만 난 그의 한 층 낮아진 텐션을 느낄 수 있었다.
그도 그럴게 다음 날 이른 비행이 예정되어 있어서 발렌틴과 나는 호텔 아주 가까운 곳에 호텔을 하나
예약했던 거라 엄마랑은 이제 헤어져야 했다.
밥을 두둑하게 먹고 , 호텔로 떠나기 전 한복투어를 시켜줬던 내 친구를 마지막으로 만나기 위해 저녁 전에
집을 나서야 했던 우리에게 또 다시 적응하기 힘든 헤어짐의 순간이 다가왔다.
현관을 나서 엄마는 발렌틴을 배웅하기 위해 엘리베이터 앞까지 나왔는데, 그런데,
발렌틴이 훌쩍였다. 발렌틴이 울고 있었다.
내 앞에선 한없이 강한 모습의 남자친구로서 남고 싶어하던 그는 우리 엄마의 보살핌에 와르르 무너졌다.
발렌틴이 울 걸 1도 예상 못 했던 나는 예상치 못해서 더 울컥했고 우리 엄마는 오히려 더 호탕하게
'울긴 뭘 울어! 얼른 가!' 하면서 등을 툭툭 하고 쳤다.
또 웃겼던게, 발렌틴을 그렇게 형처럼 따르던 내 동생도 뒤에서 묵묵히 잘 가라고 손을 흔드는 걸 보는데
그건 또 왜 이리 눈물이 나던지.
발렌틴은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에 나에게 말했다.
"너희 엄마랑 헤어지는데 갑자기 내 가슴 한 쪽이 조금 텅 하고 빈 것 같은거야. 그런거 있잖아, 엄마들만이
줄 수 있는 사랑이나 보살핌 같은거. 너희 엄마가 나한테 그걸 주셨잖아. 그게 너무 잘 느껴져서, 또 너무
오랜만에 이런 가족같은 분위기 느껴봐서 아마 그래서 그랬나봐. 너희 엄마 진짜 현명하신 분이야. 넌 정말로
너희 엄마한테 배울 거 많아." 라고.
왜 울었냐고 장난스레 다그치는 나의 말에 쭈뼛쭈뼛 하면서 발렌틴은 그렇게 말했고, 난 괜시리 마음이 더
쓰라렸다. 이런 애를 또 혼자 영국으로 보내야 된다는게 그냥 맘이 아렸다.
내 친구와 발렌틴의 우정도 무시 할 수 없는 것이기에 우린 롯데타워 쪽에서 간단히 술 한잔을 했고
서울에서 인천까지 가는 게 짧은 거리가 아니었으므로 친구랑도 꽤나 이르게 헤어져야 했는데
이번엔 내 친구가 우는거다!
얘는 또 왜이래 싶어서 나도 올라오는 눈물을 꾹 꾹 참으며 너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까
'아니, 그냥... 왠지 모르겠는데 이제 발렌틴 못 볼 거같아서. 발렌틴이 한국 이제 안 올 거 같아.'
라고 하는데 어제 내가 느꼈던 그 찝찝한 기분과 친구의 말이 오버랩이 되면서 괜히 불안해졌다.
친구는 그런 이유라기보다 그냥 한번 왔던 나라를 왜 또 오겠냐는 의미에서 말 한거였지만 난 우리의 끝을
예견하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안 쓰였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호텔에 간신히 도착했지만 내가 영국에서 한국으로 떠나기 전날의 마지막 밤 처럼 그 날도 발렌틴과
나는 빡빡한 스케줄(?)로 피곤함을 이기지 못하고 밤을 지새우며 시간을 보내진 못했다.
드디어 발렌틴이 떠나는 날이 되고 호텔에서 제공하는 셔틀 버스로 공항에 가는데 그 때부터 난 또 마음이
울렁울렁 거렸다. 이제 떠나 보내야 하네, 이젠 내가 남겨지는 구나. 이거 생각 했던 것보다 더 착잡하고
힘든 과정이었구나. 발렌틴도 이랬을까? 걘 더 심했겠지. 그게 우리의 첫 헤어짐이었으니까.
슬퍼하는 내 옆에서 발렌틴은 묵묵하게 날 달래줬다.
그때부터 난 조금 섭섭하기 시작했다. 나만큼 안 아쉬운 거 같아서. 또 헤어짐은 우리 사전에 절대 없을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엊그제 이후로 얘가 진짜 헤어짐을 고려 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제, 진짜로 떠나보내야 했다. 짐도 다 부쳤고, 커피도 마셨고.
시간을 더 이상 끌 수 없었다.
내가 언제 영국으로 발렌틴을 다시 보러 갈지는 미지수였다. 당연히 조만간 영국으로 놀러간다는 계획은
세우고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발렌틴과 말한 적도 없었고. 차라리 가는 날짜가 있었으면 그래도 예정된
미래의 만남을 두고 슬퍼하는 거라 슬픔의 밀도가 조금이나마 낮았을 텐데 그땐 그것도 아니었다.
난 게이트부터 펑펑 울기 시작했고 발렌틴이 들어갈 때까지 혼자 끅끅 거렸다. 근데 문제는,
발렌틴이 울지 않았다.
울컥하는 얼굴은 봤지만 나와 헤어질 때의 그 애틋한 발렌틴이 보이지 않았다.
들어가서 물론 나한테 '목 안에서 콱 막히는 느낌이 들긴 했는데 참았어.'라고는 했지만
발렌틴을 떠나보내서 너무 슬프다는 내 감정과 완전 별개로 뭔가 발렌틴이 날 대하는 감정의 속성이
조금 달라진 것 같아서 걱정스러웠다.
혹자는 아니 울지 않을 수도 있는건데 뭘 그거 가지고 사랑이 변했네 안변했네 하는거냐, 그건 비합리적
비약 아니냐고 할 수도 있지만 이건 나만 알 수 있는 척도 같은 거였다.
발렌틴이 안 울었다고 하더라도 변하지 않았다면 난 느낄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근데 날 바라보는 발렌틴의 눈에서 있어야 할 뭔가가 없어진 느낌이 들었다.
아주 조금, 정말 아주 조금의 홀가분 함까지 발렌틴 얼굴에서 보였다고 하면 너무 비참하려나?
근데 그게 솔직한 마음이었다, 그때는. 물론 누구한테도 말한 적 없지만.
아마 그때부터였나보다, 나와 발렌틴 관계의 추가 서서히 완전히 발렌틴 쪽으로 기울어 버린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