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가 하고 싶단건 싹 무시해버린 나.
일단 발렌틴이 처음 우리 집에 도착했을 때 가을이가 발렌틴을 반겨줬는데 우리 엄마는 종종 가을이가
낯선 사람에게 어떻게 반응하냐로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를 어리짐작 해볼 때도 있다.
물론 전혀 신빙성 없는 판단 이유지만 나도 가을이의 촉을 안 믿는게 아닐 정도로 가을이의 촉은 후에 보면
믿을 만 했었다. 그래서 가을이가 발렌틴을 만나는 순간을 더 기대했었고.
내 예상은 전혀 빗나가지 않았다. 가을이는 누구에게든 막 치대는 스타일은 아닌데 발렌틴은 보자마자
발렌틴을 아는 사람인 듯 양 엄청 안겼고 발렌틴이 짐을 다 풀고 소파에 앉자마자 발렌틴에 몸을 기댄 채
눕는 걸 보고 괜히 흐뭇해졌다고 하면 웃기려나?
난 인정한다. 내가 아주 이기적이라는 걸. 난 내가 봐도 남들보다 아주 조금 더 본성이 이기적이어서
그나마 사회적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주변 사람들에겐 티내지 않지만 남자친구에겐 그런 모습은 이미
보여주고도 남았었으며 그건 발렌틴이 한국으로 오고서도 똑같았다.
발렌틴이 얼마나 피곤했을지는 전혀 고려 하지 않고 난 얼른 롯데타워를 그와 함께 가고 싶었다.
내가 혼자 책 보러 가는 곳, 혼자 머리 식히러 쇼핑하는 곳. 그러니까 뭘 하느냐 보다 내가 항상 그 곳을 보통 '혼자' 갔다는 데 더 의미가 있었다. '혼자' 갔던 공간을 난 발렌틴과 이제 '함께' 얼른 가야했다.
그렇게 긴 비행을 하고서 얼마나 피곤했을까? 근데 그때 나는 그런건 안중에도 없었고 3주라는 시간이
너무 짧게만 느껴져 이 하루하루가 아까웠다. 하지만 발렌틴도 첫 한국이라 그런지 기대감이 너무 컸던걸까?
아니면 발렌틴 답게 날 배려해준걸까? 피곤한 티는 좀 냈지만 그는 아무 말 않고 따라 나섰다.
우린 요기를 간단히 하고 조금씩 돌아다니려던 찰나 그때부터 발렌틴이 너무 피곤해했다.
근데 나란 애 참 구제불능인게 그때도 내 감정, 내 기분이 먼저였다.
'아니 시간이 아깝지도 않냐?' 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 행동이 이해를 하려고 하려고 해도 안된다.
나라도 과거의 나를 지켜주고 싶어서 그럴만한 이유를 생각해내려고 하는데도 지금으로서도 내가 왜 그때
발렌틴을 그렇게까지 몰아붙였는지, 정말 나 못됐었다.
그때부터 이미 발렌틴한테 조금 서운한 티를 내면서 우린 다시 집에 복귀했고 발렌틴이 휴식을 취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우리 엄마가 기다리고 있었다.
발렌틴은 아주 약간 긴장한 듯 했다. 아니 엄청 많이 긴장했는데 아마 긴장 안한 것처럼 보이려고 했을 수도.
우리 엄마의 첫인상은 차가운 편이어서 발렌틴이 그럴만도 했는데 엄마도 아마 외국인이기도 하고
어쨌건 딸의 첫 남자친구이기도 하니까 처음엔 어색한 듯 했다. 하지만 저녁을 먹으면서 우린 대화를 나눴고
긴장감은 금새 풀어졌다. 우리 동생이랑은 이미 구면이니 아마 그것도 한 몫 한 듯 하고.
근데 웬만하면 발렌틴도 그러지 않았을텐데 걔가 정말 어지간히 피곤했나본지 발렌틴은 정말 이른 시간에
너무 피곤해서 안되겠다며 자러 들어가도 되겠냐고 조심스럽게 우리 엄마한테 물어봤고 우리 엄마는
피곤한 그를 이해하며 얼른 들어가보라고 했다.
걔가 얼마나 고된 하루를 보냈을지 생각하면 지금도 너무 미안하다.
그 날 이후 우리의 데이트는 시작됐다. 남산을 시작으로, 한남동도 가고 이태원도 가고.
다시 잠실도 가보고. 사실 제주도도 가보고 싶었는데 그건 시간이 허락치 않았고 그 대신 우린 부산을 갔다.
그러나 우리의 첫 부산행은 시작부터 조금씩 삐걱거렸다.
기차를 타야 하니까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발렌틴이 깜빡하고 자기 짐을 지하철에 두고 내려버린거다.
난 계획이 어그러진게 이미 짜증이 좀 나기도 했고 당황도 하고 해서 발렌틴을 막 몰아붙였는데
그한테 더 화가 났던건 너무 아무렇지 않게, 너무 말도 안되는 이유로 그가 날 탓하는거다!
'너도 신경썼어야지. 그리고 왜 나한테 내릴 때 말 같은거 걸어가지고.' 같은 느낌의 것이었다.
정확히 기억은 안나는데 어쨌건 이 상황에서 날 탓한다고? 난 이때 발렌틴한테 아주 많이 실망했다.
그때 주변에서 널 어떤 상황에서 탓하고 잘못을 돌리는 남자는 만나면 안된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얘가 그러고 있으니 괜히 발렌틴에 대한 신뢰조차도 흔들렸다.
어쨌든 우린 어떻게 어떻게 간신히 짐을 찾고 부산에 도착했다. 부산에 가는 기차 안에서 우린 더
정다운 시간을 나눌 수 있었는데 그 해프닝 덕분에 그 아까운 시간을 나누지 못한 것도 아깝고 해서
나나 발렌틴이나 얼른 각자의 기분을 풀려고 노력했다.
근데 또 하나, 문제는 발렌틴이 음식을 가리는 것이었다. 내 입장은 여기 왔으니까 이런거도 먹어봐야지
였고 발렌틴은 난 못먹겠다를 고집했다. 발렌틴에 비해 난 음식을 너무 좋아하는 사람이라 특히 발렌틴이
같이 한국에 오면 맛있는 걸 먹고 싶었는데 그는 먹는 행복(?)을 나보다 훨씬 덜 추구하는 애였다.
첫 끼인 돼지국밥에서부터 발렌틴은 좀 주저했는데 맛있게 먹었지만 몇 술 못뜨고 남겨버렸다.
우린 2박 3일 일정이었기 때문에 난 또 시간이 아까워서 이것도 해보고 싶고 저것도 해보고 싶었고
비도 추적추적 내리겠다 카페를 가서 또 복숭아 디저트도 입에 욱여넣었다.
든든한 것도 모자라 터질 것 같은 배를 부여잡고 우린 잠시 호텔에서 쉬기로 했다.
근데 날씨도 우릴 안 도와줬던게 옅게 내리던 비가 호텔에서 쉬는 사이 조금 더 굵어져 있었고
후에는 비바람까지 불었다. 하지만 난 포기할 수 없었다. 해운대 바다를 바라보며 먹는 회를.
회도 회고 그 운치를 그와 함께 즐기고 싶었고 고집해서 택시를 타고 비바람을 뚫어 횟집에 도착했는데
결과적으로 발렌틴은 회 딱 한점 이후 하나도 입에 대지 않았다.
내가 못먹겠다고 하지 않았냐며, 왜 내 말은 하나도 안듣냐고 투덜댔다. 난 나 나름대로 너의 다양한 경험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왔는데 끝까지 거부하는게 너무 미웠다.
하지만 이것도 지금 생각해보면 '널 위해서 내가 비 오는데도 회 먹자고 여기까지 왔잖아' 라는 건
영화 대사 말마따나 '비겁한 변명'이었다. 발렌틴을 위하긴 개뿔, 내가 남자친구와 부산을 왔을 때 원하던
분위기, 낭만이 있었고 횟집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회를 먹는 건 오로지 내가 하고싶은 거였다.
발렌틴은 원한적도 없고 나한테 이미 말도 했는데 난 비겁하게도 '너를 위해서'라는 말로
그의 죄책감을 건드려 이겨먹으려 하고 있었던거다.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이 최악이었고 그 최악인 상태에서 자존심 부린다고 회를 집어먹던 나는 당연히
탈이 났다. 그렇지만 아무것도 먹지 않은 발렌틴을 위해 우린 호텔 집 바로 앞에 김밥집에서 김밥 2줄과
오뎅탕을 포장해서 들어왔는데 이게 웬일이야. 김밥이 너무 맛있었다.
알고보니 그 김밥집은 굉장히 유명한 집이었고 발렌틴은 이 김밥을 부산 갔다와서도 계속 생각난다고
할 정도로 맛있어했다.
호텔에 들어와서 그는 김밥을 먹으며 그랬다.
"내가 원하는건 큰게 아니야. 봐, 이런것도 얼마나 맛있어. 호텔에서 이렇게 먹고 둘이 있어도 행복한데 왜 넌 뭘 빨리 못해서 안달인거야."
라고.
그의 말을 왜 더 귀 담아 듣지 않았을까.
왜 나의 배려 없는 행동에 점점 지쳐가던 그가 신호를 보내고 있단 걸 난 무시해버렸을까.
좀 더 행복할 수 있었던 우리의 한국 여행은 조금씩 색이 바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