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내가 너를 기다린다.
우린 떨어져 있는 동안 사랑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특히 발렌틴쪽이 더 심했는데 어찌보면 당연한건지도 모른다.
나는 한국에 다시 돌아감으로써 잠깐 벌어졌던 관계의 갭을 채우는 중이었다면 발렌틴은 내가 떠난 이후로
내가 있어야 할 자리가 계속 비워져 있는 것과 같았으니까.
하지만 우리 둘은 그래도 괜찮았다. 8월의 재회가 예정되어 있었고 난 내 나름대로 한국에 발렌틴이 온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설렜고 발렌틴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우리 둘의 재회는 너무 당연한 기쁨이라 그 점을 차치하더라도.
내가 1월달에 돌아왔으니까 8월까지는 짧지는 않은 시간이었음이 분명하지만 나는 나름대로 바빴다.
일단 학교도 다녀야 했고 오랜만에 엄마와 딸의 시간이 간절했기 때문에 홍콩 여행도 갔다왔을 뿐만 아니라
아빠가 인도에 가셨기 때문에 우린 이 기회를 이용해 두바이로 가족 여행까지 갔다왔다.
이 은근히(?)바쁜 기간 중에도 가장 끝자락에 날 기다리고 있는 건 발렌틴의 한국행 이었기 때문에
생각할때마다 가슴이 콩닥콩닥 거렸다.
마치 베를린에서 발렌틴을 다시 만났을 때의 그때 그 감정, 그 날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떨어져 있는 그 시간동안 아마 발렌틴은 날 향한 마음의 밀도가 훨씬 높아진 것 같아보였는데, 그도 그럴것이
발렌틴이 하루는 목걸이를 장만했다길래 악세서리에 관심없는애가 웬일이지 하고 말았는데 알고 보니
그 목걸이의 뒤편에 내가 영국을 떠난 날짜를 새겼더랬다.
너가 다시 영국으로 돌아오는 날까지 꼭 끼고 있을 거라면서. 우리 엄만 물론 그 말을 듣고 아주 약간
발렌틴의 사랑이 집착으로 변질하지 않을까 하며 경계아닌 경계를 했지만 난 기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어쨌든 날 이렇게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확인 되었다. 확인 한게 아니고 그의 의지에
의해 나는 능동적으로 뭔가를 할 필요 없이 사랑을 받기만 하면 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가 오는 전날, 난 별별 걱정이 다 들었다.
갑자기 비행기가 지연 되면 어떡하지? 잘 올 수 있겠지? 제대로 챙겼겠지? 하며 걱정했지만 발렌틴은
이미 한국으로 오는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어 내 걱정은 들리지도 않는 듯 했다.
다행이라고 하면 불효일지 몰라도 아빠가 한국에 안 계셨기도 하고 엄마는 굳이 발렌틴 뭐하러 돈
쓰게 하냐며 그냥 우리 집에서 재우라고 하셨다.
그때는 난 아무 생각 없이 발렌틴 돈도 아낄 수 있고, 굳이 맨날 특정 장소를 정해서 만날 필요도 없는게
훨씬 편하니까(내가 발렌틴이 따로 예약한 숙소에 가서 자는 건 엄마에게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완전 좋은 옵션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딴 짓 하려면 차라리
내 눈 앞에서 해라 라는 마음이지 않으셨을 까 싶기도 하고.
또 이 말을 할때마다 내 지인들 모두 다 너희 엄마 대단하다고 말하곤 한다. 그렇게 해주시는 엄마
잘 없다고 하던데, 그런거 보면 우리 엄만 보수적인 것 같으면서 아니란 말이지?
대망의 D-day.
매번 내가 떠나거나, 내가 보내거나. 워킹홀리데이 이후로 그런 것밖엔 해보지 않았었는데 인천공항으로
나를 만나러 오는 누군가를, 그것도 내 애인을 마중 나가는 건 생각보다 훨씬 떨리고 훨씬 기분 좋고
훨씬 설레는 일이었다. 이제 영상통화가 아닌 드디어 발렌틴을 만나게 된다니. 드디어.
막상 곧 만날걸 생각하니까 우리가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단게 실감이 나기도 했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틈에서 나 또한 까치발을 하고 발렌틴의 실루엣을 이리저리 눈으로 바쁘게
좇았으나 내 생각보다는 짐 찾아지는 과정이 지연되는 듯 했는데 우습게도 그 지연은 내 설렘을 한층 더
높였다.
그리고 드디어 보이는 발렌틴.
단번에 나는 그를, 그는 나를 알아봤다. 날 알아보자마자 함박웃음을 짓는, 선한 인상의 그를 보자마자
발렌틴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나를 보자마자 나는 울었고 발렌틴은 웃었다.
발렌틴이 내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내가 알던 그 얼굴과 그 웃음으로 하나 변한 것 없이 걸어오고 있었고 난 터져 나오는 눈물을 참지 않고
달려가 와락 안겼다. 남들 눈치 엄청 보는 나도 그때는 그런거 신경쓸 겨를 조차 없었다.
발렌틴이 내 앞에 와 있다는 그 사실 자체가 중요했을 뿐.
감격스런(?) 재회의 여운을 가지고 공항 버스로 향하려던 나를 발렌틴이 잠시 멈추고 앉아보라고 했다.
좀 정리 좀 하고 가려나보다 싶어서 앉아있는데 나에게 줄게 있다면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냈고,
그건 반지였다.
'이거, 나 너한테 진지한 마음으로 주는거야. 당장은 힘든거 나도 알아. 근데 나 너와의 관계를 정말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고 너도 내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이 반지를 준비했다는 거 알아줬으면 좋겠어.'
라고 말했다.
발렌틴은 내 생일마다 목걸이나 귀걸이를 선물하곤 했었지만 반지는 처음이었다.
반지는 그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담은 그 무언가였고, 그는 8월 한국에서 날 만나면 그걸 줘야겠다고
아마 굳게 마음 먹은 모양이었다.
만만한 마음으로 준게 아니란 건 나 또한 느낄 수 있었고 그 마음을 나에게 주기로 결정한 것이 고마웠다.
진지하게 날 생각한다고, 날 아끼고 사랑한다고 발렌틴은 또 다른 방식으로 다시 한번
말해주고 있었고 난 점점 더 그와 헤어질 수 없단 생각을 했다.
이제 발렌틴을 엄마한테, 동생한테, 우리 가을이(나의 반려견)한테, 친구들한테 보여주고 싶었다.
한국도 얼른 보여주고 싶고 모든 걸 함께 하고 싶어서 그 기대감을 감당하느라 혼났다.
그때까진 우리가 이렇게 많이 싸우게 될줄 상상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