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장거리연애 여도 사랑은 넘쳤다.

으이구 꿈까지 꾸냐.

by 글너머

한국에 도착해서 가족도 만나고 친구들도 만나고 난 너무 행복한 시간을 보냈지만

절대 발렌틴에게 소홀하게 굴지 않았다. 그때쯤에 깨달았다.

아 내가 얘를 생각한 것보다 더 많이 아끼고 사랑하고 있었구나 라는 사실을.

아빠는 내가 남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계셨기 때문에 아빠가 한국에 계실 동안은

몰래 몰래 연락 해야 했지만 우리 둘에게 시차란 별로 문제 되는 것이 아니었다.

영상 통화 너머 보이는 익숙한 방 안에서 혼자 있는 발렌틴의 모습이 안쓰럽고 미안했고 마음이

너무 쓰인 나머지 연락도 더 자주 하게 됐던 것 같다.

다행히도 내가 나가고 나서 발렌틴은 같이 살 친구를 찾았고 비싼 렌트비를 혼자 감당하지

않아도 되었으며 얘가 외롭진 않겠구나 해서 안심했다.


그는 보고 싶은 마음을 전화로 표현하는 스타일이 아니었고 후에 우리는 이걸로 자주 싸우게 되었지만

그때는 그가 먼저 전화해주지 않아도 충분히 날 얼마나 그리워하고 아끼는지 알만큼 표현해줬다.

뜬금없이 아주 길게 날아온 카카오톡 메시지에는 내가 다시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이 얼마나

절절하게 표현되어 있던지. 내 마음이 스르르 하고 녹아내렸다. 메시지 안에는 매번 내 꿈을 꾸는

발렌틴이 있었고 정말 열심히 일해 부자가 되어서 나와 결혼하겠다는 치기 어리고도 나름 귀여운(?)

각오를 가진 다부진 발렌틴도 있었다.

사랑받는다는 느낌은 항상 담뿍 메시지에 담겨 전해졌고 난 그것만으로 너무 행복했다.

날 이렇게나 사랑해주는 사람이 내 옆에 있지 않더라도 존재하고 있었고 난 고맙게도 그 덕분에

자존감도 높아졌다. 아이러니하지만 모두가 아는 진실 같은거 있지 않은가.

떨어져 있으면 더 소중하게 되는 그런 거. 그런걸 우리도 겪은 것 같다.


또 그때 그 시절 로맨티스트(?)였던 그는 곧 다가오는 발렌타인 데이를 혼자 나름 준비해놓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난 왜 이렇게 그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을까 싶다, 왜 그리도 받기만 했는지.

그도 얼마나 그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받고 싶었을지. 나 같으면 서운하고 섭섭해서 곪아버렸을 감정을

혼자 삼켜왔을지 생각하면 너무 미안하고 후회된다.

그는 나 몰래 나랑 가장 친한 친구에게 우리 집 주소를 몰래 물어봤고 내 친구는 확인 차 내 동생과

우리 엄마에게까지 연락해 정확한 집 주소를 발렌틴에게 전달하는 나름 스펙타클한 과정을 거쳐

발렌타인 데이에 선물을 배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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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자마자 떠오른 건 그의 눈망울이었다.

내 앞에 없었지만 그걸 주는 그의 눈이 내 앞에 선했고 그는 또 한번 그의 방식으로 사랑을 확인 시켜줬다.


우리의 끝이 어찌 됐든 간에 이것만큼은 확실하다.

그 순간, 그 시절엔 우린 그 누구보다 굳건한 우리의 세계에서 반짝반짝 하게 사랑했다.

그에게 이만큼 못해줬네 어쨌네 하는거 지금은 다 소용없는 후회인거 알지만, 또 누군가는 사랑하는 사이에

이런거 엄청 특별한거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거 다 알지만.

아무도 모르는, 정말 나와 그만이 알고 있는 우리가 나눴던, 내가 주고 받았던, 그가 받고 주었던 그것만큼은

우리 관계 내에서 유일했고 유효했으니까. 소중하다. 빈틈없이 소중하고 또 소중하다.


그래서 장거리연애는 적어도 나에게는 전혀 장애물이 되지 않았다.

어차피 나 대학교만 졸업하면 석사 하러 너한테 갈거고, 좀만 참자 였지만 발렌틴에겐 아마 참을 수 없이

힘들었던 듯 하다. 표현은 잘 못할 지 몰라도 그때 그는 나에게 너무 진심이었다.

그는 머지 않아 8월 한국 행 비행기를 끊어버렸고 우린 그때만을 고대하며 꿋꿋이 장거리 연애를

이어갔다. 물론 안 싸웠던 건 아니다. 그때의 나는 걔의 자발적이며 잦은 연락이 그 아이의 사랑을 증명하는

길이라고 생각했고 내 기준에 미달하면 투덜투덜 댔으며 발렌틴은 아마 그 단계에서 조금씩 지쳤는지도

모르지만, 그건 후의 일이고 우린 싸움은 중요하지 않았다.


싸움이 어떻게 됐건 간에 8월달에 우린 만나게 되어 있었고

그게 중요했다, 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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