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부산에서 우린 작은 다툼이 그 이후로도 몇번 있긴 했지만 해운대 바다도 즐기고 그 맛있다는 소갈비도 먹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그가 감탄 할 때 마다 난 혼자서 엄청 뿌듯해 하곤 했었다.
밤의 송정해수욕장은 감미로웠다. 눈에 보이는 풍경임에도 감미로웠다. 우리 둘이 함께라서, 별거 아닐 수도
있던 풍경이었지만, 그 날의 그 밤바다와 버스킹 하는 분들의 노랫소리, 적당한 수의 사람들, 적당한 길거리의
밝기. 적당히 낭만스러웠고 충분히 행복했다.
발렌틴은 우리의 캐리커쳐를 가지고 싶어했고 비록 엄청 오랜 시간이 걸렸고 우릴 닮진 않은 그림이었지만
우리를 하나의 그림으로 남겼단 것 자체도 추억이었다.
부산에서 서울로 돌아가는 날은 찌는 듯이 더웠지만 우린 다시 한번 바다쪽을 산책하며 부산에 안녕-했다.
돌아오는 길도 그와 함께여서 외롭지 않고 든든했다.
부산을 필두로 내 친구들과 매번 만난건 당연한데다가 동생이 발렌틴과 같이 야구를 보러 가고 싶다고 해서
야구도 우린 같이 보러 가고 그러다 나와 동생이 싸우게 됐는데 싸우는 못 볼 꼴도 발렌틴한테 보여줘버렸다.
얼마나 쪽팔리던지. 이건 부끄러운게 아니라 쪽팔린다는 표현에서 나오는 어감이 훨씬 내가 느낀 그 기분에
가깝다. 여튼,
또 우린 매번 나돌아다닌 것 만도 아니었다. 엄마가 퇴근 하고 나면 우린 우리 집에서 저녁을 같이 먹고
오손도손 모여서 루미큐브를 했다.
말이 서로 오가지 않아도 게임으로 나의 가족들과 발렌틴은 한층 더 가까워졌다. 루미큐브는 우리 가족이
저녁에 하루 일과가 끝나고 종종 잠들기 전 심심풀이로 하던 것이었고 거기에 발렌틴만 낀 것 뿐인데
그 기억은 아직까지 오래도록 나에게 따뜻한 잔상으로 남아있다.
발렌틴이 부산에서 말했던, 큰 게 아닌데 커다랗게 다가오는 그 어떤 것. 영화로 이 장면을 만들었다면
몽글몽글한 추억을 묘사하는 플래시백 장면같이, 내 마음을 뭉근히 데워주는 그런 순간들.
이 시간들이 아마도 발렌틴에겐 굉장히 크게 자리잡고 있는 듯 했다. 이혼 가정에서 자란 발렌틴은 나에게
가끔씩 자긴 가족들과의 시간을 많이 나눠본적이 없다는 뉘앙스를 내비치곤 했는데 그래서 그런지
괜히 더 마음이 쓰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가 한국에서 와서 한 건 모조리 다 '내가 발렌틴이랑 하고 싶은' 것 들이었다.
발렌틴이 하고 싶어하던 스포츠 몬스터 같은 곳 가보기, 한복 입어보기 등등 별 게 다 있었는데 난 그걸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기려는 계획 조차 하지 않았다. 나 왜 이렇게 못됐지. 쓰면서도 부끄러울 만큼 못됐었네, 나.
그리고 발렌틴의 경복궁 가서 한복 입어보기는 웃기게도 내 가장 친한 친구에 의해 이루어진다(?).
나랑 가장 친한 친구기에 발렌틴과는 이미 영국에서도 연락을 많이 했었고 내 친구는 왠지 모르게 자기와
발렌틴의 성향이 비슷한 것 같다며 나랑 발렌틴이 싸워도 발렌틴의 관점에서도 날 이해시켜 주려고 했다.
그만큼 발렌틴이랑 가까웠고 그래서 나보고 진짜 이기적이라고 나무라던 내 친구가 경복궁 데이트를
그에게 선사했다. 우린 경복궁은 아쉽게도 어떤 이유로 인해서 가지 못했지만 창덕궁을 가서 드디어 한복을
대여했다. 물론 나와 친구도 한복을 입었지만 하이라이트는 갓을 쓴 발렌틴.
입고 좋아하는 발렌틴을 보니까 괜시리 맘 한 구석이 울적해졌다. 너무 미안해서. 저렇게 함박웃음을
짓는데 난 뭐했던 거지.
그 날의 발렌틴은 아마 행복했을 거다.
자기가 그렇게 좋아하는 동양의 건축미도 경험하고, 한복도 입어보고. 아무 노포나 들어가서 돼지갈비를
저녁으로 먹었는데 그때도 그는 아무 곳이나 랜덤으로 들어가서 먹는 게 너무 좋다며 어찌나 만족하던지.
버스로 돌아가는 길, 난 결국 터져나오는 눈물을 참지 못했고 당황한 발렌틴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너가 이렇게 좋아하는데, 그냥 이런 것만 했어도 너가 행복했을텐데. 나 보러 한국까지 온 너한테 내가
뭔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내가 줘야했을 너의 함박웃음을 내 친구가 너에게서 자아냈을 때,
그리고 너가 진심으로 행복해 하는 걸 봤을 때 너무 부끄럽고 미안해서 아깐 마음이 아리더라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런 날 발렌틴은 다시 한번 토닥여줬다.
그 이후 난 발렌틴이 하고 싶어하는 걸 하기 위해 나름 노력했다.
우린 내 동생과 함께 발렌틴이 가고 싶어하던 빠지를 갔고 발렌틴은 너무나 즐거워했다.
아이같이 노는 발렌틴과 내 동생을 보면서 흐뭇했다.
하지만 빠지를 갔다온 시점엔 정말 발렌틴이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었고 돌아오는 길에는 마음이 부산에서
집으로 돌아갈 때와는 결이 다소 달랐는데,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시간의 압박이 한층 맘을 조여왔고 공허했다. 매번 발렌틴에게 그렇게 미래에 일어날 일을 걱정말고 현재를 즐기라고 잔소리를 들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때는 그럴 수 없었다. 이제 발렌틴은 곧 떠나야 했고 내가 남겨져야 했다.
우리에게 남겨진 시간은 고작 2일.
내일은 진짜로 제대로 우리 둘만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난 맘이 급했고 또 발렌틴이 한국에서 몇번이나
나에게 바랬던
'큰 거 하지 않아도 우리 둘이 뭔가를 하면 충분하다' 라는 말은 내 마음 속 어딘가에서 조급함이라는 것에
미끄러져 자취를 감추어버렸고 그 다음날 우린 발렌틴의 한국 여행에서 있었던 수많은 다툼들 중
가장 큰 다툼을 겪는다. 하지만 이건 나도 억울하다.
매번 약속시간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발렌틴이었고 그 버릇을 난 제대로 고쳐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 날은 어딘가에서 본 남자친구 길들이기(?) 같은 방법이었는데 아무 잔소리도 하지 않고
딱 제한시간을 주라는 것이었다. 난 그대로 실행했다.
"발렌틴, 딱 10시 50분까지만 나와줘. 너 언제 준비 됐냐고 들들 안 볶을 테니까. 알았지?
10시 50분이야 10시 50분!"
내 기대와 달리 그는 10시 50분을 넘겨 나왔다. 사실 딱 5분밖에 안 늦었고 지금 생각하면
그냥 넘겨도 됐었겠지만 나 또한 반복되는 그의 행동에 지쳤던 것, 시간이 얼마 안남았는데 내 마음도 몰라주는 그에 대한 섭섭함, 이 방법도 안 먹히는 그는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감. 그리고 이 이외에도
말로 할 수 없는 여러 부정적인 감정이 뒤섞여 그에게 난 아주 크게 화를 내버렸고 그는 결국 폭발했다.
발렌틴은 나에게 헤어지자고 말했다.
이제 내가 한국을 떠나면 그만 만나자고. 우린 그렇게, 내가 그리도 아깝다고 했던 그 시간을,
그가 떠나기 단 2일 전에 반나절의 시간을 통으로 날려버렸다.
말도 안됐다,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