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나보다 친구들이 더 좋지?

행복했지만,

by 글너머

발렌틴이 이사해놓은 새 집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좋았다. 사진 그대로였지만 더 포근하고 아늑한

느낌이었고 오랜 비행으로 지친 나를 발렌틴은 충분히 배려해주었다. 첫날은 짐을 풀고 깨끗이 씻은 후

하루종일 잠만 잤지만 그는 한국에 처음 왔던 그를 질질 끌고 갔던 나와 다르게 충분히 쉬게 해줬다.

그 때 한번 더 미안해졌던게 얼마나 피곤한지 내가 몸소 체험하고 나니 그 때 발렌틴 엄청 버티고 있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죄책감이 다시 들기도 했다.

아쉽게도 발렌틴은 내가 온 기간동안 홀리데이를 내지 못했지만 나 또한 홀리데이를 낼 만큼 나랑 꼭 붙어

있어야 한다는 압박감은 주기 싫기도 했고, 오랜만에 영국 왔는데 알던 친구들도 보고 하면 좋을 것 같아서

난 나만의 시간도 보내곤 했다.

오랜만에 내가 일하던 한식당도 찾아가서 인사도 드리고, 아직까지 일하던 친구들이랑 술도 한잔 하고.

발렌틴은 내가 없을 때도 이 식당에 와서 밥도 자주 먹고 가곤 했다고 매니저 언니가 말해주셨다. 얜 나랑

사귀고 난 이후로 한국 음식을 사랑하게 돼버렸다.


그리고 난 충격적인 정보(?)를 접하게 되는데,

내가 그렇게 미루고 미루던 석사 준비는 진작에 했어야 한다는 말을 영국에 와서야 알게 된다.

런던에서 슬슬 준비하려고 했던 나에게는 청천벽력이 아닐 수가 없었는데 이 이야기는 석사에 관해서

얘기 할때 쓰기로 하고. 여튼 그래서 발렌틴이 일할 때도 난 나름 바빴다.

석사 준비를 해야 했고 그래서 23일 밤에 그가 일할 때 난 노트북을 들고 가서 파이브 가이즈 구석에

쳐박혀 석사 준비를 했더랬다.


석사 준비는 석사 준비지만 발렌틴과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소들을 다시 데이트 하기도 하고

내가 한식당에서 매니저 언니,오빠, 친구들과 술을 먹고 있을 때 발렌틴도 날 데리러 왔다가 같이 조인해서

술도 함께 마시고 했다. 또 내가 가장 기대했던, 그리고 가장 좋아하는 크리스마스가 목전이었기 때문에

먹을 거리를 잔뜩 쇼핑하고 돌아와서 우린 집에서 우리만의 크리스마스 파티를 했다.

물론 나와 발렌틴만 있던 게 아니고 발렌틴의 친구들도 있었고 발렌틴의 제일 친한 친구의 여동생도

잠시 그 집에서 머물고 있었지만 다 좋은 아이들이었고 특히 파이브가이즈에서 다 내가 알던 애들이었기

때문에 불편한건 없었다. 발렌틴은 그렇게 자신만만해하는 BBQ를 마당에서 구웠고 맛있는 저녁도,

또 각자가 각자에게 준비한 크리스마스 선물도 트리 밑에 놓고 교환도 하는 등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솔직히 말하면 발렌틴과 나만의 크리스마스를 보내지 못해서 아쉬운 감도 있었는데 발렌틴이

엄청 행복해 보였으니 나도 행복했다.

그리고 런던에서 겨울이면 꼭 가야 하는 윈터원더랜드.

영국에 살면서 한번도 안 간 적 없는 윈터 원더랜드를 다 같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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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크리스마스, 추운 겨울 안 따뜻한 불빛으로 가득찬 축제, 좋은 친구들.

또 마지막으로 발렌틴. 더 할 나위 없이 행복으로 가득 가득 찬 하루였다.


그렇지만, 우리의 이야기에 싸움이 빠질 수는 없는 것 이었을까.

나와 발렌틴은 또 싸우곤 했는데 이번 싸움은 예전에 우리가 싸우던 것과는 결이 좀 달라진 느낌이라고 할까. 저번에 언급했듯이 관계추가 한층 기울어진 관계에서의 싸움이라 그런지 그가 나와 다툴 때의 태도,

또 이 다툼을 대하고 바라보는 방식 자체가 달라진 것 만 같았다.

하여간 발렌틴이 좀 달랐다. 다툼을 굉장히 지켜워하는 느낌 혹은 기운 같은 것이 그의 몸 전체를 에워싸서

날 대놓고 거부하는 느낌이 들었다고 해야 할까?

물론 다툼은 나도 지겨웠다. 나도 그만하고 싶었고. 근데 내가 지겨워하는 느낌이랑은 조금 달랐다.

아마 내가 먼저 시작해서 그러는 걸거야 라고 애써 좋게 좋게 생각은 하려고 했지만 불길한 느낌은 쉬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또 그가 감정이 격해졌을 때 나에게 하는 말의 수위 자체도 높아졌는데, 욕을 하는

차원에서의 수위가 아니라 내 마음을 칼로 푹푹 쑤시는 것 마냥 잔인하게 생채기를 냈다.

잠깐 같이 지내던 발렌친 친구의 여동생이랑 그 기간에 친해졌는데 그 여동생도 나한테 얘기를 듣고

어떻게 그런 말을 할수 있냐고 할 정도면 말 다했다.

그는 아주 조금 달라져 있었다. 내가 느꼈던 그 촉이 또 다시 나 맞았다고 고개를 빼꼼 들며 내 눈치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가장 큰 변화는 이제 나 말고도 소중한 사람들이 생겼다는 것인데 그건 바로 친구들이었다.

발렌틴은 2층에서 나랑 있다가도 나와의 사이에 조금이라도 불편한 기류가 흐르면 그대로 1층으로

직진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나와의 다툼 후 그 다툼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지도, 가질 수도 없었다.

굳이 머리 아프게 생각하기도 싫고 1층만 가면 아무 생각 하지 않고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아마도 내가 한국에 있을 동안 그의 마음속의 빈자리는 그들로

채워졌던 듯 하다.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발렌틴의 인생에서 친구들의 존재감이 얼마나 커졌는지.

한국에서는 친구들과 잘 지내는 모습이 다행이라고, 외롭지 않아도 되어서 그건 잘 됐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이런 식으로 나에게 돌아올 줄은 꿈도 생각 못했다.


그는 분명히 날 사랑하고 아끼고 있었다. 그건 나도 느낄 수 있는데, 미묘하게 달라진 그 또한 나만 느낄 수

있는 것이었고 그게 너무 답답했다. 아무리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어도 아무도 이해 할 수 없는.

오로지 그의 사랑을 받아본 나만이 알수 있는 변화였던 지라 혼자 가슴 속에 불안함을 파 묻고 있어야 했다. 그 조차도 의식하지 못하는 변화였을 텐데.

예전엔 아무리 지지고 볶고 싸워도 순도 100의 감정으로 날 대했던 그 라면 지금은 어디선가 흘러 들어온

물에 희석 된것처럼 순도가 확연히 낮아져 있는 그의 감정, 그리고 그 감정을 마주할 때마다 내 가슴은

너무 불안했다.

얘가 왜 이러지? 왜 이럴까? 싸우는 순간엔 티를 내지 않았지만 싸우고 날 때마다 날 남겨두고 친구들을

보러 가는 그와 있을 때면 난 너무 외로웠다.


이때 알아차렸어야 했다. 친구들과 같이 사는 남자친구와는 같이 살면 안된다는 걸.

그러나 미래의 먼 일이었고, 그때까지 그는 날 아껴줬으니까. 낮아진 밀도였지만 온도는 아직 뜨끈 했으니까.

난 그래도 믿었다. 그가 나에게 맘이 없어질 거라고는 상상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말 그대로 상상 불가능.

그리고 역시, 내가 한국으로 다시 떠나던 날 그는 울지 않았다.

이제 그는 울 이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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