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해주는 나나 받는 너나.
난 그가 내 친구에 관한 질문을 하자마자 '옳다구나'싶었다. 내 성격상 절대 맘 안에 있는 말을 꽁꽁
숨기고 있지 못하는데 이 말만은 내가 먼저 꺼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걔가 먼저 물어봐 준 게 어떤 의미에선
차라리 잘 됐었단 생각도 들었다. 난 내 친구는 잘 도착했다고 했고 친구가 있던 기간동안 내가 느꼈던 생각을
그에게 솔직하게 고했다.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그래서 그렇게 짜증낸거냐고, 말이 되냐고 아무리 그래도
너 친구한테 다른 방식으로 다가갈수 있겠냐고 변명을 해 댔다. 하지만 난 그의 변명에 속아넘어가지 않고
'알지, 만약 너가 진짜 그런 맘 느끼면 미친놈 일거라고 생각해서 재밌게 놀려고 같이 놀자고 한건데 너가
그럴 줄은 꿈에도 몰랐지. 근데 내가 널 모르냐고. 너 내 친구 약간 맘에 들어한 거 티가 안났는 줄 아냐고.
아무리 그래도 그런 식으로까지 행동하면 안됐지. 넌 선 넘은거였어 그건, 나에 대한 예의나 존중이 단 한 톨이라도 남아있었다면 그렇게 할 수 없었어.' 라고.
걘 내 말을 듣고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한다며 둘러댔지만 또 그렇다고 억울해 미치려는 애 같지는 않았다.
제발 그의 털 난 양심이 콕콕 찔렸기를 바랬다.
드디어 도착한 새 집. 처음 살게 된 스튜디오 였고 Unfurnished 였기 때문에 말 그대로 정말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침대 매트리스부터 청소도구, 하나하나 다 사야 할 것이 가득 넘쳤지만 드디어, 진짜 드디어.
난 더 이상 1년 간 집을 옮기지 않아도 됐고 행복감에 도취됐다. 그는 짐을 다 옮겨주고선 집을 잘 골랐다며,
하지만 너 진짜 각오해야 할 거라며 맘을 단단히 먹으라고 했다. 이젠 내가 감당해야 할 관리비들이
어마어마 하다고. 순간 훅- 하고 두려워졌지만 일단은 그런 것보다 이사 왔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
한국인들의 국룰은 이사 하고 짜장면 먹기지만 영국에서 짜장면을 쉽게 찾을 수는 없었고 그래도 이사 기념
맛있는 식사를 외식으로 하고 싶었는데 또 발렌틴과 같이 하고 싶었다면 난 바보인걸까?
그와의 관계는 그 어떤 단어나 문장으로도 함축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레이어가 너무도 겹겹이 쌓여있지만
그래도 가장 가깝게 내가 그에게 느끼는 마음을 표현해줄 수 있는건 '애증' 같다.
그가 밉지만 좋고, 고맙지만 싫다. 실망스럽지만 제일 편하고, 날 비참하게 하지만 제일 안심된다.
그와 같이 지내면서 배운 걸 하나 꼽으라고 하면 난 단연코 '양가감정'을 고를 것이다.
완전 반대되는 감정들의 공존은 완전히 가능하다고. 나에게는 서로 대립되는 감정이 역설적이게도
같이 손을 잡고 찾아온 적이 너무 많아서 당황스럽기도 하고 내가 이상한가 싶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미묘하게 얽힌 여러 감정들을 그냥 당연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적어도 나에겐 퍼센티지의 차이가 있었을 뿐
그것도, 이것도 다 그에 관한 내 마음이었고 납득이 되는 감정이었기 때문에. 이 이해하기 어려운 감정을
내 감정의 주인인 '나'라도 이해해줘야지 그럼 누가 이해해주겠나.
그에게 은근슬쩍 밥을 먹자고 제안했지만 그는 다른 약속이 이미 있었다. 또 다시 자존심이 조금 구겨졌지만
이제 이런 것쯤은 아무렇지 않은 척 잘 할 수 있었다. 어쨌건 이렇게 자기 시간을 내서 내 이사를 도와준 것
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웠으니.
이제 내가 살 집도 잘 얻었고 이 집에서 취업준비만 열심히 하면 됐다. 다른 골칫거리들이 일단은 어느 정도
갈무리 되었던 상태였고 그 말은 고로 내가 발렌틴에게 어떠한 연락을 할 '거리'가 있지 않단 걸 의미했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가. 이미 양가감정에 대한건 고백했으니 한결 더 편하게 그에게 얼마나 연락을 많이
했는지 이제는 속 편히 까발려야겠다. 난 날씨가 좋을 때건 안 좋을 때건 아르바이트를 안하고 쉴 때면
그에게 제일 먼저 연락했다. 당연히 자존심 상 그에게 연락하는 걸 망설일 때도 있었지만 결국에 내가 찾는 건
그였고 그는 역시나 또 나를 무시하기 시작했다.
다른 친구들이랑도 좀 놀라고, 왜 맨날 나한테만 연락하냐고.
누군가는 정말 날 위한 말을 한거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난 충고를 빙자한 무시였다고 생각한다.
그에게만 매달렸던 내 행동은 아마 그에게 '역시 얘는 나밖에 없나' 라는 생각을 심어주기에는 충분했나본지
특히 그의 문자에 은근히 깔려 있는 '넌 나 아니면 안되니?' 식의 태도는 물론 기분 나빴다.
문제는 그의 문자만 그렇게 매몰차고 다정하지 않았던 거지 막상 만나면 또 그렇게 웃기고 좋았다.
그 악순환에서 난 벗어나질 못하고 그와 그렇게 연락을 지속하던 찰나, 그가 이젠 정말로 파이브가이즈를
나올거라고 말했다. 난 적극동의했다. 정말 지독히도 오래 일했다, 얘도.
그리고 난 발렌틴에게 내가 일하는 한식당에서 일해보라고 제안해보는건 어떨까 생각했다.
난 내가 개입되어 있는 어떤 것에서든 발렌틴을 떠올렸고 일자리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매니저
언니 오빠가 이젠 외국인도 한번 고용해보려고 한다고 하셨던 찰나 당연히 내 머릿속에 떠오른 건 그 밖에 없었다. 참 웃기게도 난 발렌틴을 그렇게 미워하면서도 또 발렌틴이 어느 누군가에게 무시 받거나 걔의 능력을
제대로 인정해주지 않으면 꽤 속상했다. 또 그가 얼마나 똑똑한지, 자기가 맡은 바 일은 얼마나 책임감 있게
잘하는지 보여주고 싶었다. 난 정말 천진난만한 꼬마 아이처럼 그럼 발렌틴은 어떠시냐고 언니에게 한껏
들뜬 채로 물어봤고 언니 오빠는 발렌틴만 괜찮다고 하면 당연히 찬성이라고 했다. 외국인을 고용하는 것이
처음이지만 언니 오빠가 그를 일단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가 피해 주는 행동은 하지 않을 거라는 것에서
일단 믿음이 가신다고. 언니 오빠도 내가 그의 집에서 쫓겨 났을 땐 당연히 그를 미워하고 이해하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감정에 치우쳐 그의 행동을 너무 한 쪽으로만 해석 했던 경향도 분명히 있었다고,
그래서 예전엔 나의 '언니'로서 그를 미워했지만 이젠 아무 감정이 없다고 나에게 말해주셨다.
다시 발렌틴과 그렇게 붙었다 떨어졌다 하는, 누군가는 이해할 수 없는 우리의 관계와 나의 행동을 언니는
항상 열린 마음으로 이해해주셨기 때문에 나 또한 어찌보면 아무 고민 없이 발렌틴의 일자리를 제안 했던
것도 있다.
괜히 뿌듯했던 난 곧바로 발렌틴에게 달려가 내가 일하는 곳에서 일해볼 생각 없냐고 제안했고 내가
일하는 곳은 다른 곳보다 페이가 세단 걸 알고 있던 발렌틴은 이미 마음을 먹은 듯 했다.
그는 다시 한번 나에게 매니저 언니 오빠가 정말 괜찮다고 하신거냐며 재확인을 거쳤고 난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그는 바로 파이브가이즈에 노티스를 줬고 발렌틴은 속전속결로 내가 일하는 식당에서
일하게 됐다. 당연히 걱정이 앞섰지만 다 떠나서 같이 일하는 곳에 그가 있다는게 어찌나 좋던지.
그러니까 이게 뛸듯이 나는 기분, 이 기쁨을 주체할 수 없는 그런 식의 즉각적이고 강렬한 감정이라기 보단
뭉근하게 마음이 따뜻해지는, 그런 느낌이었다. 버팀목이 생긴 느낌. 그러나 그와 동시에 또 내가 데리고
온 애라는 생각이 들어 막중한 책임감도 생기고.
하지만 중요한건 이제 그에게 따로 연락하지 않아도 일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제 내가 일하는 곳에서 일하게 됐단 소식을 제일 처음 접하게 된 내 제일 친한 친구는 우리를 정말
이해할 수 없다며 고개를 절레 절레 했다. 이해를 못하는게 충분히 이해가 가서 굳이 변명 따위
하지도 않았다. 그도 그럴게 전 남자친구와 아직도 연락하고 만나는 것만 해도 누군가에겐 말도 안되는
걸 텐데 이젠 그걸 넘어서 일자리를 주선하고 같이 일을 한다고 하니. 이건 뭐 헤어진건지 아닌건지.
누군가는 미련이라고도 할 수 있었고 또 미련하다고 할 수도 있었단 걸 알지만 항상 그 시기에 중요 했던 건
일단 내가 지금 뭘 원하는가 였다. 이미 후에 힘들어도 내 몫이라는 각오가 있었기 때문에 난
내 마음이 동할 때마다 그에게 연락했다.
정말 그에게 연락하면서 다른 걸 바란건 결코 아니었다. 이렇게 지내다가 다시 만난다던가 하는 건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이미 꼬일대로 꼬여 푸는 것 조차도 시도하기 어려운 목걸이처럼, 그래서 그냥 그 꼬인
목걸이를 끼지 않고 방치하는 것 처럼. 나와 걔의 관계도 딱 그랬다.
그는 이제 나에게 '전 남자친구' 였던, 단지 그런 관계였었던 '소중한 사람'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내가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도 있었지만 우리 둘은 그렇게도 지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더 이상 만나봐야 좋을 거 없단 친구들의 말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전 남자친구였을 뿐 이제 우리가 뭐
서로에게 사랑하는 감정이 있는 것도 아닌데 뭐가 문제인걸까 라는 생각도 안했다면 거짓말이고.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난 그가 내 앞에서 누군가에게 플러팅을 하는 걸 보는 것도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해야 했다. 이건 뭐 환승연애를 혼자 찍는거나 마찬가지였다.
말마따나 이제 전 남자친구인 그가 누군가를 맘에 들어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난 모른 척, 그의 사랑을
'동료'로서 응원하는 척 해야 했기 때문에. 또 이제 그 '누군가'는 내 친구도 아니어서 난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