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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너머 Aug 28. 2023

23.감히 내 친구를 넘봐?

저희 사이 아무리 봐도 이해 안되죠?

물론 한국으로 떠날 때에 짐은 아직 발렌틴의 집에 고스란히 있었지만 그래도 한국에서 다시 영국으로 

돌아올때의 짐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난 그 짐들과 함께 한달간 이사를 거의 3번 넘게 했던 것 같다. 그 집에 5일 간 있으면서 집을 열심히 찾았고 그 짧은 기간 안에 얼마나 맘 졸였는지 모른다. 

영국의 이사 과정은 정말 복잡하지만 그건 월세를 낸다고 할 때의 이야기고 6개월치를 선납하면 세입자가 

누구인지 하는 불필요해보이는 지난한 과정은 과감히 생략된다. 역시 돈인가.

매니저 언니는 정말 열심히 내가 집 찾는 것을 도와주셨고, 너무너무 괜찮아 보이는 집이 하나가 있어서

나도 돈 많은 척(?) 좀 해봤다. Deposit, 그러니까 보증금을 내면 거의 가계약 상태인 것처럼 돼서 

다른 사람들이 계약할 가능성을 막을 수 있는데 비디오로 봐도 너무 괜찮아 보였고 난 바로 deposit을

지불했다. 1주치였으니 할 수 있었던 거다 그것도. 

너무 다행히 집은 비디오 그 이상으로 상태가 좋았고 드디어, 드디어 이사를 하지 않아도 됐다. 

하지만 이사는 8월 3일에 가능했고 내가 계약을 마친 건 7월 초였기 때문에 1달동안 임시로 머물 공간이 

필요해서 Camden 쪽에 집을 하나 구해서 살게 됐는데 그 집은 정말 최악이였다. 

집 상태가 너무 엉망이었지만 딱 1달이니까 잠만 자고 나온다는 생각으로 그 곳을 들어가게 되었다. 


드디어 내 진짜 집으로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 이사는, 발렌틴이 도와줬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5일 있던

집에서 나와 다시 Camden의 집으로 들어가기까지 약 2일정도가 남았는데 그 2일은 발렌틴 집에서 

지내야 했다. 이제 정말 수중에 돈이 없었고, 발렌틴도 이리저리 이사다니는 나한테 그동안 미안했나 본지

2일 이상 머물러도 된다며 갑자기 관용을 베풀더라. 하지만 나도 더 이상 그의 방에서 살면서 눈치 보고

싶지 않았다. 단 4일 정도 머무르는 그 기간동안 어찌나 그의 눈치를 보고 또 그 플랏메이트의 눈치를

봐야했는지. 씻으러 가면서도 참 비참하고, 근데도 또 어찌할 도리가 없어서 더 비참했다. 

그들의 눈치를 보는게 당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땐 그 현실이 그렇게도 야속해 보였다.

그 플랏메이트는 아마 발렌틴에게 약간의 연정을 품고 있었던 듯 한게 발렌틴이 자기 친구가 온다고 

말한 순간부터 발렌틴을 대하는 태도가 바로 쌀쌀해졌다고 그는 말했다. 당연히 그녀의 동의를

구해야 했기 때문에 괜찮냐고 물어봤고 그녀는 동의했지만 동의한 것 같지 않은 모호한 대답을 했는데

'있어도 좋지만 엄청 불편할 것 같긴 해.' 라고.

아마 그녀는 완곡하게 거절한 것이었을 테고 그도 그녀의 말에서 불편한 기색을 느꼈을 테지만, 또 

나도 눈치가 없는 편이 아니라 원래라면 절대 안 들어갔을 테지만, 그땐 정말 상황이 상황인지라 

어쩔 수 없이 그 집에서 지내게 됐고 그녀는 있는 대로 티를 다 냈다. 

그들이 살고 있는 집은 정말 너무 작아서 각자 방, 욕실, 주방 으로만 이루어져있는 아주 간소한 구조의

집이었기때문에 문을 닫는 소리도 조심하지 않으면 굉장히 크게 들린다. 내가 온 이후로 그녀는 일부러 문을

쾅쾅 세게 닫고 또 발렌틴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한다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더 있으려고 해도 더 있고 싶지 않았다. 물론 발렌틴은 이제 그녀의 눈치를 보는 것 조차

질려버려서 포기한 듯 했지만. 


내가 너의 집에서 조금 지내도 되냐고 했을 때 내 부탁의 손길을 매몰차게는 아니더라도 결국엔 거절하는

그를 보았을 때 느꼈던 배신감은 상상 이상이었다. 설마 했는데 또 결국엔 날 힘들게 하네- 하고. 

그의 상황이 이해가 안 갔던건 전혀 아니다. 매번 말하지만 항상 머리로는 이해가는 사실이 마음에까지 

와닿지 않을때의 그 괴리감이 힘들다. 더 크게 다가왔던 건 나를 지금 도와주기가 꽤 곤란할 거라는

그의 현재 상황을 이해하는 것 보다 이런 상황인데'도' 나를 하나도 신경써주지 않는 다는 사실에 상처 

받았다. 이 또한 내 잘못, 그리고 우리의 잘못이었다. 헤어진 마당에 아예 안봐야 정상인 우리의 사이는

애매모호한 우리의 대처로 어떻게든 얼기설기 꿰어진 채 지속되고 있었고 그 모호함이란 건 내가 

원하거나 필요할 때마다 그를 '남자친구'의 프레임안에 가둬 놓곤 해서 뭔갈 해주지 않으면 서운해했다. 

어떻게 보면 그럴 필요가 당연히 없는 일임이에도 불구하고 한 때는 그래도 죽고 못사는 사이였는데 

이제는 남보다 못하게 날 대한다고? 라는 공허한 원망감이 그를 향한 내 마음에 가득했다. 


근데 또 정말 웃긴건, 난 아직까지도 발렌틴이랑 노는게 제일 재밌었단 거다. 

팩트였다. 이 팩트에서 비롯된 내 감정은 누구라도 이름을 바꿔 부를 수 있는 것이었다. 미련이 될 수도 있고

아직 사랑이라고 부를 수도 있고, 편안함이라고 부를 수도 있고. 이런 감정을 토로할 때마다 주변인들에게서

이 사실에 붙여진 감정의 이름들이었다. 뭐라도 좋았지만 나에겐 어떤 감정을 가리느냐보다 그 사실이

중요했고 그래서 끊어야 할 타이밍이라고 아무리 조언을 들었어도 다음 따윈 생각하지 않았다. 

이미 후에 힘들어도 그 몫은 내거라고 단단히 마음 먹고 있었으니까. 적어도 지금은 그와 놀고 싶었다. 

멍청하게도 시간 지나면 예전에 느꼈던 배신감의 큰 부피는 이미 바람이 빠지는 풍선처럼 온 마음을

빠르게 휘익- 하고 휘저어다니다가 한 구석에 쳐박혀 방치 되어 있었다. 날씨가 좋으면 그와 놀았다. 

그가 된다고 하면 기뻐하고, 날 무시하는 듯한 말투로 '나한테 그만 놀자고 해, 왜 계속 나한테 놀자고 

하는거야?' 라며 무참히 내 자존심을 짓밟으면 또 팽-했다가 오랜 시간 지나서 다시 연락하고. 

그도 그걸 내 연락을 받고. 이런 패턴은 일정기간 계속 반복이었다. 


하지만 또 한번 정이 탈탈 털린 사건이 있었는데, 이건 정말 '사건'이다. 

해프닝이라고 하기엔 결코 가볍지 않았으니까. 

꽤 친한 친구가 해외 출장으로 독일에 머물렀고 일이 끝나면 휴가를 써서 영국에 4일 정도 놀러오기로 했다. 이 고달픈 영국 생활에 도착한 그녀는 마치 구원자 같았고 이 이쁜 영국의 여름을 같이 즐길 수 있는 사람이 있어서 어찌나 좋았는지. 그녀도 어렴풋이 어느 정도는 나와 발렌틴의 스토리를 알고 있는 친구 중 한명이었는데 발렌틴은 한번도 직접 본 적이 없는 친구였다. 

그래서 친구한테 파이브가이즈 햄버거도 좀 공짜로 줄 겸, 소개도 해줄 겸 파이브가이즈로 건너가

인사를 시켜주고서 같이 술도 먹게 됐는데, 이게 좀 분위기가 묘했다. 내가 아는 걸로 봐서는 그가 

내 친구를 맘에 들어하는 것 같았다. 

그래, 그럴 수 있다. 뭐 어쨌든 우리 둘은 헤어졌고 헤어진 사이에서도 친구로 지낼 수 있으니까 이것도

완전 바람직한 건 아니지만 있을 수 있는 거라고는 치는데 아무리 그래도 내 친구에게 딴 맘 먹는건 진짜로

좀 아니지 않냐고. 

아닐 수도 있으니까 지켜보기로 했지만 좀 쎄하긴 했다, 아무래도. 


하지만 발렌틴을 믿기 이전에 난 내 친구를 믿기도 했고 그냥 원래 다정한게 천성인 그니까 그런거라고 

애써 보이는 그 이상한 텐션을 무시했다. 그래서 우린 내 친구가 있는 그 4일동안 거의 같이 시간을 

보냈는데 걔는 우리가 부르는 족족 안된다고 하는 일 없이 무조건 조인했다. 그렇지만 함께 있는 시간동안

점점 내가 느끼는 이상한 촉은 쌓여갔고 친구가 떠나기 이틀 전 날 밤 난 폭발하고 만다. 

참으려고 했지만 아예 등을 돌리고 둘이서만 얘기하는 건 일부에 불과하고, 내가 은근히 티를 냈는데도 

그는 눈치를 안 보는 건지, 아니면 둔한 건지, 아님 더 최악으로 자기가 이렇게 하는게 정말 아무 

타격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지. 여러 가능성이 있었지만 어쨌든 '이건 아닌 것 같다'를 온몸으로 표현해도

발렌틴은 멈추지 않았다. 물론 걔가 막 대놓고 구애하고 이런건 아니었더라도 기본적으로 나에게 대하는 

태도와 그녀에게 대하는 태도의 결이 달라도 너무 달라서 거기서 빈정 상한 것도 상한거고 아무리 

분위기를 풀려고 편한 우리 사이를 핑계 삼는 다고 해도 나와 그녀를 은근히 비교하는 듯한 그의 행동은

멈춰야 했다 어느 선에서. 그때부터는 내 친구도 너무 야속하게 느껴져서 우린 그날 술자리를 아주 아주 

찝찝하게 끝마쳤고 난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친구에게 솔직하게 내 마음을 터놨다. 

발렌틴이 그런 마음을 느끼는 것 같고 걔도 진짜 미친놈이지만 너한테도 서운하다고. 난 그녀도 선을 

제대로 긋는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야속했던 거다. 물론 사람의 그 '선'이라는 기준은 너무 

다르기도 해서 내가 본 발렌틴의 행동은 플러팅이었지만 설령 발렌틴이 진짜 플러팅이었다고 해도 

걔가 나한테 말로는 아니라고 할 수도 있는거고. 100% 솔직해지지 않고서야 진위를 가릴 수 없는 

이 감정을 두고 야속하다 서운하다 어쩌다 말 할 수 없는 걸 알지만 난 내 관점에서의 상황을 전달했고

친구는 진심으로 미안해했다. 

그럴 일은 절대로 없을 거라는 전제하에, 좀 더 같이 재밌게 놀아보자고 주선한 이 만남이 이런 식으로

방향을 틀지는 몰랐기 때문에 더 어이없고 서글펐다. 


이런 일들이 있었지만 그에겐 내 친구가 떠나고 만약에 걔가 내 친구 얘기를 한번이라도 먼저 꺼내면

그때 '꾸짖어야지'라는 생각으로 그에겐 뭐라고 먼저 말하지 않았다. 따진다기보다 정말 '꾸짖고' 싶었다.

너가 아니라고 하면 할 수 없는데 어쨌건 내가 너의 눈에서 본건 이성적인 텐션이었고 그건 정말 아니었다고. 


내 친구가 한국으로 돌아가고 8월이 성큼 다가왔다. 

드디어 난 이사를 갈 수 있었고 고맙게도 그는 차를 다시 렌트해서 나의 이사를 도와주기로 했다. 

짐을 다 싣고서 새 집으로 향하는 길, 

그는 뜬금없이 물었다. 


너 친구 그래서 잘 도착했대?

라고. 이제 널 꾸짖을 때가 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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