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날 챙기는건 너뿐이구나.
같이 일하는 한 여자 직원을 그는 맘에 들어했다. 마음이 쿵-하는 것 따윈 사실 없었다. 그렇게 붙었다
떨어졌다를 많이 했는데 우리에게 서로를 똑바로 바라볼 건실한 감정이 남아있을 리 없었고 그 즈음엔
그가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해서 충격을 먹거나 그런 정도는 아니었다. 지는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서도,
한편으로는 이 유독한 관계가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만나야 끝날 거라고도 생각했고.
적어도 그가 다른 누군가를 만나면 그때는 내가 정말로 심심해서 하는 연락도 하지 말아야 하니까.
그리고 또 희한하게 그와 그 여자직원의 관계를 더 밀어붙여줬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찌질한 짓이었다.
그의 다음 사랑을 응원하는 마치 '쿨'한 전 여자친구라도 되는 것처럼 별 법석을 다 떨면서(물론 매니저
언니 오빠 빼고 아무도 우리의 전 관계를 알지 못했다.) 그 여자 직원한테 발렌틴 참 괜찮은 애라고 아무도
시키지 않은 큐피드 짓을 하고 다녔다. 아마도 아무렇지 않은 척을 빙자한 나만의 방어기제 아니었을까.
나의 도움 없이도 그들의 관계가 진전된다면 너무 모호하고 이상해질 것 같은 기분을 이미 예감해버린 내가
미리 선수쳐서 그들을 돕고 '내가 걔네들 잘 되게 도와줬잖아' 라고 말할 수 있으면 그나마 비참한 기분이
덜 할 것만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도 공감 못 할 수도 있지만.
또 이렇게 하면서 그들의 마음을 계속 떠봤다. 한번은 같이 나, 발렌틴, 그 여자 직원 그리고 다른 몇몇과
함께 술도 잠깐 마신 적이 있는데 난 괜히 오버하면서 더 그들을 부추겼다. 이런 분위기 조성을 하는 게
그들 사이에 미묘하게 이어지는 그 썸이라는 기류를 방해할 수 있을 거라는 직감같은게 발동 했나보다.
물론 내 탓은 당연히 100% 아니겠지만 어쨌든 그들은 잘 되지 않았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벌어지지 않은 일이기에 응원해줄 수 있었을 텐데 하고 쉽게 말할 수 있는거지 또 그들이 정말 잘 됐다면
상상할 수 없는 묘한 기분에 휩싸였을 수도 있고.
여튼 이런 해프닝이 있었지만 발렌틴은 한식당의 일에 잘 적응 해 나갔다. 첫 외국인 직원이라 처음엔
다른 직원들도 조금 낯설어 하는게 있었지만 예전에 말했듯이 발렌틴은 조용한 듯 보이나 은근히 사교적인
스타일이라 금방 사람들과도 친해지고 일도 금방 배웠다. 파이브가이즈 매니저를 몇 년 해서 그런지 자신의 일머리에 대한 자부심도 있었고.
하지만 발렌틴은 내가 어쨌건 일을 소개시켜준 애다 보니 한식당의 직원들에게 얘가 얼마나 일을 잘 하고
괜찮은 애인지 더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일을 더 많이 아는 나는 걔한테 이래라 저래라
잔소리를 엄청 했고 안그래도 자부심에 차 있는 그는 내 잔소리에 '어디서 개가 짖나' 식의 태도로 응대했다.
우리가 알아온 그 4년이라는 짧지만 또 긴 시간에 볼 거 안 볼 거 다 본 사이인 우리는 단지 일에서 아는 동료
사이 그 훨씬 이상으로 편했고 다시 말하면 선이 없었다. 그래서 가끔은 사람들 보는 데서 말다툼도 했다.
당연히 사랑싸움은 아니었고 일을 하다가 충돌하게 된 적이 여러 번 있어서 몇몇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눈치
보게도 만들었다. 게다가 한식당의 시스템에 대해서 불만이 쌓이고 있던 발렌틴은 싸울 때마다 넌
매니저 언니 오빠의 편만 든다며 나에게 불같이 화내곤 했지만 실상 내 마음은 그런게 아니었는데.
난 오롯이 발렌틴에 대한 애정으로 그가 인정 받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한테 좀 더 모질게 군거였는데 마음이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통했으면 이 세상의 모든 첫사랑은 이루어졌을 테지.
하지만 그렇게 치고박고 싸우고 서로에게 감정이 상해 토라진 경우도 많았지만 미우나 고우나
날 챙겨주는건, 그리고 내가 가장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건 그였다.
눈 관리를 굉장히 소홀히 하는 나는 일회용 렌즈도 절대 한번만 쓰고 버리지 않고 내 눈이 뻑뻑해 질 때까지
재사용 하는 편이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잘못된 렌즈 사용과 불운이 겹쳐 내 눈에 문제가 생겼다.
한 2주동안 계속 눈이 충혈됐는데 그냥 피곤해서 빨개진 눈이 아니라 눈이 시큰시큰히 아프고 눈 안의 하얀
부분이 무서울 정도로 빨개져서 렌즈를 잠시 끼지 않았고 그럼 또 나아지길래 워낙 둔한 나는 괜찮아지겠지-히고 넘겨왔던 눈 통증. 난 왼눈과 오른눈의 시력이 같아서 오른쪽 눈에 착용했던 렌즈를 왼쪽 눈에 사용해도
아무 상관은 없지만 물론 구분해서 끼곤 했는데 렌즈를 끼다 안끼다 하던 그 즈음엔 잠시 착각을 해 바꿔서
끼게 됐고 일 하는 날 오전부터 슬슬 빨개질 기미가 보이더니 저녁에는 볼 수가 없을 만큼 빨개졌다.
근데 이게 그냥 빨개지기만 하는 건 상관없는데 정말 오른 쪽 눈이 빠질 것 같았다. 눈이 퉁퉁 부어오르는
것이 느껴지고 눈을 뜨면 눈이 아픈건 기본이고 눈이 너무 부어 뜰 수 조차 없었다. 눈알이 빠질 것 같은,
한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고통에 난 너무 두려워졌다.
그도 그럴 것이 2018년 런던에서 갑자기 급격히 썩어버린 이 하나가 날 엄청 고생 시켰던 적이 있었는데 그 때의 기억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은 긴 싸움이었기 때문에.
정말 외국에서 아프면 고생한다고, 외로워서 고생하는 게 제일 크겠지만 난 그때 발렌틴이 항상 옆에
있었기 때문에 그건 문제가 안됐으나 진짜 실질적 문제는 영국의 후진국스러운 의료시스템이었다.
그렇게 비싼 돈을 내고 공짜로 진료 받을 수 있는 NHS의료시스템은 공공기관의 일인 것이라 당연히
수요가 많을 수 밖에 없어 돈을 안내는 대신 굉장히 오래 기다려야 한다. 사적 의료기관으로 가면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비싸고. 그때도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치통으로 너무 고생했기 때문에 다시
이런 수준의 고통을 겪게 될까봐 난 훅-하고 두려워졌다.
다행히도 그때 2층에서 발렌틴이 일하고 있었고 발렌틴은 내 눈을 보자마자 굉장히 놀라며 너 당장
A&E(영국의 응급실)를 가라고 했다, 하지만 그 A&E라는 곳은 기본 대기 시간이 3-4시간이라는 곳으로
악명이 높기에 그 밤에 새벽까지 혼자 기다리고 있을 용기가 없었다.
발렌틴은 그게 지금 문제냐며 너 지금 이렇게 두면 정말 큰일난다고 눈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냐고 날
엄청 꾸짖었다. 눈이 생각 보다 더 심각해지는 것 같아 난 30분 일찍 퇴근하고 나니 그때가 일요일 밤
10시 쯤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혼자 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내려가는 길에 2층에 들려 발렌틴에게 잠깐 손짓해서 '나,.. 같이 가줘. 나 정말 너무 무서워서 혼자 그런데
못가겠고 기다리는 것도 얼마나 오래 기다려야 할지 생각하면 벌써부터 괴로워.' 라고 하니,
'알았어, 일 끝나자마자 갈테니까 일단 얼른 가봐.'
천군만마를 얻은듯이 든든해진 나는 아픈 눈을 부여잡고 일하는 곳에서 가장 가까운 응급실로 얼른 달려갔다.
일요일이기도 하고 새벽이 다 되가니까 사람이 별로 없을 거라는 희망은 헛된 것이었다. 진료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엄청 많지 않은 듯 했지만 이 사람들을 다 케어 해줄 충분한 수의 의료진이 없어 보여
엄청 지연되는 듯 했다. 간단히 내 상태를 체크 하긴 했지만 진짜 진료를 보기 위해선 대기 시간이 3시간 예상
된다는 말에 어찌할 도리가 없던 난 두 눈을 꼭 감고 발렌틴을 기다리기만 했다.
어찌나 고통스럽던지. 기약없는 기다림에 눈은 계속 빠질 것만 같은데.
그리고 등장한 나의 구세주, 발렌틴. 다른 것보다 더 눈에 진심인 발렌틴은 내 옆에 앉아서 계속 그냥 가서
얼음찜질하면 나아질 거라는 날 무시하고 달랬다. 눈이 이렇게 까지 되면 일단 검사는 받아야 한다고.
하지만 거의 기다린 지 두시간이 다 됐는데도 내 이름이 불릴 기미가 안 보이자 발렌틴은 점점 이 영국의
시스템에 화가 나는 듯 했다. 말이 되냐며, 응급 환자가 있는데도 이렇게밖에 처리를 못하는 응급실에 너무
화를 냈고 난 이미 그럴 기력도 없었다. 일단 너무 지쳐있어 한 쪽 눈을 잡고 앉아있는데 그가 급하게 서치를 하더니 여기서 버스를 타고 좀만 가면 눈 전문으로 하는 응급실이 있다며 그쪽으로 가자고 날 끌고 나왔다.
난 일단 어디든 좋으니 이곳을 얼른 벗어나고 싶었고 추운 겨울 날 버스를 기다리는데 발렌틴이 내가 자기가
입던 자켓을 벗어줬다. 자켓도 벗어주고, 나 아프다고 새벽까지 같이 병원도 가주고.
고마움도 고마움이고 갑자기 이런 사람이 내 옆에 있다는 사실이 너무 안도되면서 버스를 기다리며 그에게
팔짱을 끼고 머리를 어깨에 기댔다. 다시금 뭔가 남자친구같은 존재가 생긴것만 같아서 아픈 눈과 다르게
마음은 조금 따스해졌다.
다행히도 그 안과 병원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바로 진료를 받을 수 있었지만 의사가 딱 1명이라 내 전의
1명을 진료하는 것만도 30분이 걸려서 어쨌건 1시간만에 진짜 의사를 볼 수 있게 됐다.
안과 전문이다 보니 뭔가 안약을 넣어주는데 넣자마자 씻은 듯이 사라지는 눈의 통증으로 그나마 숨통이
트였다. 아마 바이러스 같다고 2주간 렌즈도 끼지 말고 처방받은 항생제를 주기적으로 넣으라는 진료와
함께 드디어 병원을 떠날 수 있게 됐다. 큰 문제를 하나 해결하고 나서 시간을 확인해보니 벌써 새벽 4시.
이제 나 볼일 끝났으니 발렌틴을 그냥 집으로 가라고 하면 난 배은망덕한 인간이 되는 거였다.
우버를 잡아 바로 우리 집으로 같이 가서 우리 집에서 재웠고 난 배고파하는 그를 위해 라면도 끓여줬다.
너무 고마워서 이거 말고도 사실 더 해주고 싶었지만 너무 피곤했기 때문에.
미우나 고우나 그렇게 그는 매번 그의 다정함으로 날 챙겨줬다.
싸워도 항상 내 밥을 챙겨줬던 것 처럼 헤어졌어도 난 그에게 그래도 되는 것처럼 기댔고 그가 날 받아줄 걸
알고 있었다. 그렇게 우린 헤어진 척, 가끔씩 남자친구 여자친구 놀이를 해왔다.
나도 그냥 그렇게, 그렇게 만족하고 있었다.
그렇게 발렌틴과 나름 투닥투닥 대며 지내던 그 겨울에 부모님이 갑자기 영국에 들른다고 하셨다.
딸 좀 보러 오겠다고. 그리고 내가 일하는 식당도 한번 가보고 싶다고 하셨다.
잠깐만.. 그럼.. 엄마가 다시 얘랑 마주치는 거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