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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너머 Sep 01. 2023

27.내 연애의 끝(예고 없는 끝).

허무하지만 갑작스럽게. 

부모님이 오신게 작년 11월이니까, 우린 그 이후 그냥 그렇게 지냈다. 오랜만에 우리 사이에 특별한 일이 

없었다. 그리고 그 또한 몇 달 후 한식당을 그만 뒀고. 

어쨌건 남들은 쉽게 겪어보지 못할 이런 관계, 그리고 이 관계 안에서 주고 받았던 감정들과 단어들. 

첫 연애를 이렇게 스펙타클하게 할 줄은 나도 몰랐다. 아무리 헤어졌다 다시 만났다 하는 커플들이 많다고는 

하지만 나와 그 사이의 관계의 속성은 만만치 않게 유니크 했으니까. 

그 11월 이후 우린 그냥 쭉- 평탄하게 보냈다. 가끔씩 만나기도 하면서, 서로 돕기도 하면서. 

그렇지만 큰 업앤다운 없이. 우리 관계가 저물어갔다고 해야 가장 알맞은 표현이려나 싶지만, 그러했다. 

물론 가끔씩 날씨가 좋은 날이면 가장 만만한 그에게 전화해서 만나자고 연락해서 광합성도 같이 하고

맥주도 마시고. 그는 이제 정말 딱 친구처럼, 나와 가장 친한 베스트 프렌드가 되어 내 삶 안에 자리 잡아

내 마음의 한 쪽 부분을 지탱해주고 있었다. 떠들썩하지 않고 잔잔하게. 


그리고 정말 신기하게도, 그냥 갑자기. 정말 갑자기 이제 그만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나를 제외한 

나와 발렌틴의 관계를 아는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나 혼자 애써 피했던 진실같은거. 

뭐 예를 들어보자면, 나만 놓으면 이제 이 관계도 아무 의미 없어질 거라는거.

내가 모르고 있었다고 하면 아주 새빨간 거짓말일테고, 이미 매번 내가 먼저 연락해서 만나자고 할 때부터

그는 나라는 사람의 크기가 그에게 있어서 만나도 그만 안 만나도 그만 인 정도의 크기로 인식하고 있다는 건 느끼고 있었다.

이따금씩은 내 연락에 지친다는 걸 노골적으로 드러내곤 했으니까, 자존심을 박박 긁혀서 문제였지. 

그냥 그의 천성인 다정함이 문제였던 걸로 하자. 내가 못 놓았다고 하면 자존심 상하니까. 

내 감정, 기분에 충실하고 싶었다. 너가 거절 안하면 그걸로 된거지 하고 또 회피했었다. 지금 너랑 노는 게 

제일 편하고 어쨌건 서로 만나는 사람 없고 서로에 대해 진지하지 않으니까 널 만나는게 어떤 부분에서

큰 문제인지 모르겠다며 애써 회피했던 지난 근 6-7개월들. 


역시 남녀관계에는 발을 들여놓는 게 아니다. 주변 사람들이 너를 갉아먹는 짓이라며 만나지 말라고 말라고 

그렇게 말을 해도 그렇게 말을 안 듣더니 이토록 갑작스럽게 완전한 이별을 결심하는 나만 봐도. 

아무 소용 없는 일이다. 

이유는 나도 정말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어서 여기에 털어놓는 거다. 나도 정말로, 모르겠다. 


지난 6월 말에 한식당에서 같이 알게 된 친구와 여행을 가게 됐다. 락다운 이후의 첫 여행이라 엄청 설레기도 

했지만 너무 오랜만에 다른 외국으로 나가는 거다 보니까 온갖 걱정이 앞섰는데, 웃기게도 또 발렌틴을, 

그리고 그와 했던 첫 바르셀로나 여행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씁쓸하더라. 

그때의 그 설렜던, 그와 아직도 눈만 마주치면 좋았던 그 몇 년 전의 기억들이 지금의 상황과 맞물리면서 

은근히 밀려오는 씁쓸함을 막을 길이 없었다. 내 첫 설렘의 순간에 옆에 있었던 그와 지금은 고작 

이런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게 서글펐다. 그때가 새벽이었으니 물론 혼자 또 새벽감성에 찔찔댄걸 수는 

있지만. 여행 가기 전날 눈물 콧물 다 흘리며 혼자 청승을 떨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그와 완벽히 헤어지기로. 내 마음과 행동의 불일치에서 오는 이 모순을 나도 이해 할 수 

없었지만 지금에야말로 우리의 관계에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영화같았으면 주인공이 울면서 페이드아웃되며 끝났겠지만(이것도 클리셰인가?) 이건 현실이니까,

그냥 연락 안하고 말았으면 그만인데 마지막 연락을 해야겠다며 혼자 찔찔 울면서 걔한테 연락 했다. 

'우리 이제 더 이상 만나면 안되는 거겠지? 내가 너한테 아무 용건없이 그냥 연락하고 만나자고 하는거 

이거 널 방해하는거지?' 라고. 이별하겠다더니 또 그냥 떠봤다. 

그리고 발렌틴은 내가 아는 그 답게 냉정하고 단호했으며 정확히 요점을 파악했다. 

이런 관계는 너와 나 우리 둘 다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않으며, 나에게만 의존하는 건 정말 그만 해야 한다고. 

내가 단지 '편해서' 연락하고 만나자고 하는거 그만해야 한다고. 그러면서 나에게 인생에 대한 조언을 하는

그였다. 가끔씩 그는 나를 무슨 자기 여동생이나 딸처럼 대했고 아직 내가 한참 인생에 대해 배울 게 많다는

아이 취급을 했었는데 이번에도 그는 감정에 너무 휘둘리면 안된다는 나름의 귀한 조언과 함께 틱톡을

보내더라. 인생 조언, 자기 계발의 메시지가 가득 담긴.


그걸 보는데 너무 내가 아는 '그'라 또 한번 눈물이 툭 하고 터졌다. 그게 너의 방식이고 날 생각해주는

너의 표현인데 내가 널 어떻게 미워하겠니. 애인, 그리고 전 애인 그 이상으로 이젠 나한테 다른 존재가 

되어버린 그였지만 이젠 서로를 위해서라도 만나지 않아야 한다는 이 현실이 너무 서글프고 슬퍼서. 

내 맘 속에 너무 큰 부분을 아직 차지하고 있던 그를 강제로 도려내야 한다는게 그냥 너무 싫었다. 

그 메시지를 끝으로 난 더이상 그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물론 여행을 가서도 그가 많이 생각났다. 특히 첫 날, 바르셀로나에 도착했는데 몇 년 전에 왔었는데도

내가 발렌틴과 걷던 그 거리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가라앉더라. 영영 돌아오지 않는 것들, 다시 그때 

그대로 느낄 수 없는 것들. 반복 할 수 없는 것들. 아스라이 기억 저 편에만 존재 하는 것들. 


여행 도중 발렌틴이 슬쩍 마음을 뒀던 친구가 독일로 출장을 왔다길래 영국으로 다시 돌아가기 전

독일에 들려 친구와 시간을 보냈고 술을 홀짝이다가 지금 내가 그에게 느꼈던 감정을 말했다. 

친구 또한 단호했다. 과거에 그만 얽매여 있어야 한다고. 내 친구 또한 장기 연애를 하고 헤어졌을 때 

그 시간을 어떻게 견뎠나, 그리고 그 혼자 보내는 시간이 얼마나 값졌는가를 얘기해주며 날 응원해줬다. 

그녀에겐 가능한 것들이 나에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성향 차이도 있을 테고, 상황 차이도 

있을 테고 게다가 난 한국에 살지도 않고. 그렇지만 그녀가 헤어지고 나서 얼마나 그녀만의 시간을

값지게 보냈는지, 그리고 후회가 한톨도 남아있지 않을 만큼의 그 보람찬 시간에 대한 말을 들으면서 

다시 한번 이별을 굳게 결심했다. 


나름의 긴 여행이 끝나고 돌아온 런던. 

그때가 7월 초였는데, 그러니까 약 두달 전. 런던의 날씨는 최악이었다. 

7-8월 내내 날씨가 좋았던 날이 합쳐서 1주일 밖에 안될 정도로 흐리고, 은근 서늘하고. 

유럽의 여름은 적어도 영국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게 나한텐 다행이었다. 

날씨 좋은 날 누군가와 시간을 보내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그 누군가가 발렌틴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안해도 됐어서. 난 그 시간을 오롯이 나에게 투자할 수 있었다. 취업이든, 이 브런치를 통한 글쓰기든. 


그리고 난 아직까지 한번도 그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물론, 그도 나에게 연락을 한번도 하지 않았다. 

아직도 문득 문득 그가 생각이 난다. 특히 이렇게 그와의 연애담을 쓰고 있으면 펑펑 우는 날도 생긴다. 

그렇지만 그에게 더 이상 다가가지 않는다. 단지 그가 잘 살았으면 싶다. 

이렇게 내 연애는 끝났다. 이 첫 연애가, 지난히도 길었던, 지독히도 슬펐던, 그렇지만 미숙해서

더더욱 이쁘게 빛났던 이 연애가 끝났다.


아니, 아직 끝내는 중이다. 완벽히 끝났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아직도 나는 처리 중이다, 이 감정들을. 

그렇지만 언젠가 다가올 완벽한 끝을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중이다. 

어쩌면 이별은, 내가 가장 준비가 덜 되었다고 생각할 때 정신 차려 놓고 보니 내가 해버린게 진짜 이별일 수

있구나 싶다. 우린 진짜 끝났다. 그리고 난 그를 내 마음에서 완전히 떠나 보낼 준비가 거의 다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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