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괜찮아.
아픈 걸 좋아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다.
그 중에서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픈 걸 보는 것 만큼 고약하게 아프다.
그 사람이 안 떠났으면 좋겠지만, 문득문득 이제 모든게 끝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불쑥 고개를 쳐들고 머릿속을 헤집는 날들이 오곤 하면 자신을 책망한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냐고, 내 마음에 큰 꿀밤을 먹이면서.
그리고 이는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야 한다.
아무도 알아서는 안되는, 나만의, 내밀한 이기심.
본능이란 본래 못될수록 더 달콤한 유혹이어서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가 전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잠깐이나마 내 마음 편히 뉘일 수 있는 해방감에 마음을 맡기고 싶어질 때도 있으니까.
하지만, 안된다. 그 누구한테도 말할 수 없다.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지 않고 나조차도 납득할 수 없는 이런 마음인데
타인이 어떻게 나의 이런 마음에 설득당하겠냐고 생각하며 애써 그런 마음을 내쫓는다.
그런 우리를 위해, 예술이 존재한다.
영화 몬스터콜에선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듯한 엄마 옆에서 힘들어하는 아들이 그 중심에 있다.
그리고 갑자기 그의 인생에 등장한 나무 괴물은 듣기도 싫은 이야기를 강제로 들려주며 또한
강제로 그에게 요구하는 듯 하다.
솔직해지라고. 너의 악몽을 통해 솔직해지라고.
소년은 짐짓 괴물의 요구를 이해하지 못한 척 하지만, 사실 알고 있다.
악몽에서 엄마의 손을 놔버린 건 힘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고.
더 붙들고 있을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만하고 싶어 놓아버렸다고.
소년은 그런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고, 그래서 더욱 솔직해질 수 없었다.
더 이상 자신의 해방감을 위해 엄마를 놓아버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게 되버릴 것이기 때문에.
하지만 나무 괴물은 차분히 위로한다, 너의 그런 마음과 엄마를 사랑하는 마음은 별개라고.
동시에 들 수 있는 마음이라고.
그러니 혼자 죄책감에 끙끙대지 않아도 된다고.
그리고 우리는 위로 받는다.
소년을 대표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봤던 사람들에게 영화는 따뜻한 위로를 건넨다.
우린 알고 있다. 우리에게도 이런 순간들이 문득 문득 찾아온다는 걸.
그리고 그런 생각을 했단 것 자체에 죄책감을 느꼈던 순간들이 우리 마음에 오버랩되며
영화 속 소년이 결국 솔직하게 고백하는 그 때에
우린 울고 만다.
현실에선 여러가지 이유로 솔직해질 수 없던 우리에게, 나무 괴물이 건넨 솔직해도 괜찮다는 위로는,
따뜻하다.
영화를 다 보고 일어나는 우리는 그렇게 또 다시 힘을 얻는다.
예술이 주는 위로에 감사하며.
절대 말할 수 없는 비밀들은 필히 존재한다. 그래서 가끔 우리는 버겁다.
하지만 괜찮다, 예술은 그래서 존재한다.
예술을 통해 우린 우리의 감정에 정당성을 부여받고 그 순간 안심하고 위로받는다.
모두를 위해 존재하는 공동경험인 예술은 동시에 가장 조용하게
‘그럴 수 있는 것도 인간이다’를 인정 받을 수 있는 공간이다.
그래서 우린 가끔 지독히도 솔직해질 수 있고 그래서 살아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