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균열속에서 나를 지켜낸다는 것
기억이 자꾸 흐릿해진다.
예전엔 한두 줄 문장은 한 번만 봐도 금세 외웠다.
지금은 휴대폰 인증번호 네 자리도
‘뭐였더라?’ 하고 두세 번은 다시 확인해야 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잊혀가는 것들이 늘어갈수록
더 또렷하게 남는 기억도 있다.
바로 할머니와의 시간들.
그건 내 머리에, 심장에, 그리고 영혼 깊숙한 곳에
문신처럼 새겨진 기억들이다.
지워지지 않는다.
아니, 지워지고 싶지도 않다.
나에게 할머니는,
사랑이었고, 현실이었고,
그리고 무엇보다 노동지시자였다.
“가시나가 공부해가꼬 뭐 할라꼬! 엥가이 해라이.”
“이년아~ 머리털 굵은 게 방구석에 쳐박혀 있지 말고 콩이나 털어라!”
시험공부를 한다고 앉아 있으면
책을 덮어버리시고 불을 꺼버리셨다.
사실 그 책상도 책상이 아니었다.
다리 하나 부러진 밥상에 낡은 책을 쌓아
기울지 않게 만든 대체 책상.
결핍은 늘 대체로 이어지고, 그 대체는 곧 생존의 방식이 되었다.
그렇게 사춘기는 콩과 함께 털렸고
쪽파와 함께 잘렸다.
주말이면 쪽파 20단을 머리에 이고
새벽 5시 15분 빨간 완행버스를 타고 좌천 5일장으로 갔다.
시장에서 할머니를 아는 이들은
“아이고, 손녀랑 같이 왔는갑다! 착하네~”
그 말 한마디에, 나는
시장의 착한 손녀이자, 이른 노동자의 얼굴을 가진 아이가 되었다.
그런 내게, 할머니는 항상 단호했다.
“정신 똑바로 차리래이! 한 눈 팔지 말고!”
그러던 할머니가
한 번은 온전히 나를 ‘믿고, 기대고, 도와주셨던’ 날이 있었다.
바로 대학입학 시험 날이었다.
매일 “대학가서 뭐 할라꼬~”라며 반대하시던 그분이
그날은 새벽 5시, 마당에 돗자리를 펴고
소반 위에 오징어다리와 물 한 그릇을 놓고
온 조상님들을 다 부르셨다.
“앞에 가신 조상님요~ 뒤에 가신 조상님요~
우리 철옥이가 시험 본다예~
이 아이 머리 좋고 착하니 잘 부탁드립니더~”
할머니의 입에서, 그 긴 말 속에
욕은 하나도 없었고 사랑은 가득했다.
그날 나는 수석으로 입학했다.
사촌오빠가 운전한 샷시작업용 1.5톤 트럭을 타고 간 그날,
나는 세상에서 가장 진심 어린 응원을 받으며 시험장에 들어섰다.
기억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한 번은 리어카 사건이 있었다.
84세 할머니를 태우고 리어카를 끌던 나.
“할매, 힘드니까 여기 타이소~”
말은 멋졌지만, 현실은 비포장 오르막.
좌회전 구간에서 나는, 리어카와 함께
밭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가랑이는 찢어지고, 피는 흘렀고,
리어카는 거꾸로 뒤집혀 있었다.
“하…알머니이이이!!!”
조용했다.
너무 조용해서, 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것 같았다.
그때, 리어카 안에서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가 저승이가? 이승이가?”
“하이고~ 이년아. 나를 죽일라꼬 개수작을 부려도 오지게 부린데이~”
그때 나는 깨달았다.
사랑은,
밭 아래 굴러 떨어져도, 웃음으로 마무리할 수 있는 기억이라는 걸.
그 모든 기억은
내게 존엄을 알려준 기억이다.
존엄은 위엄이나 자격이 아니라,
존재 자체로 지켜져야 할 무게라는 걸 할머니는 알게 했다.
나는 할머니의 노동력 대상이었지만,
동시에 세상 누구보다도 사랑받았고 기억된 사람이었다.
이제 교실에서 나는 아이들을 바라본다.
그들의 눈 속에서, 옛날의 나를 본다.
무시당하거나, 소외되거나,
어딘가에서 애써 버티는 아이들.
그 아이들에게 나는 말하고 싶다.
“너의 오늘이, 언젠가 타투처럼 남는 기억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기억이,
네가 무너질 때마다 널 다시 일으켜주는 힘이 되기를 바란다.”
기억은 존엄이고, 존엄은 결국 사람의 얼굴을 한 채 우리 곁에 머무른다.
할머니처럼.
그래서 나는 오늘도 기억을 심는다.
작고 선명하게,
한 아이의 마음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