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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는 있지만 변함없는 입장

오늘도 입장합니다, 삶이라는 놀이에

by 유쾌한 철옥쌤

“선생님! 우리 절대로 이 게임하고 나서 안 울게요! 꼭 한 번만 해요.”

“우리 팀이 져도, 진짜 짜증 안 내고 화도 안 낼 거예요.”

아이들이 내미는 약속은 언제나 순수하지만, 언제나 깨지기 쉽다.

피구는 그렇게 시작되고, 그렇게 마무리된다.

승부가 결정되는 순간, 어김없이 울음이 터지고, 억울함이 번지고, 감정은 얼굴을 타고 흐른다.

작은 공 하나를 사이에 두고 7살의 감정은 흑백으로 갈리고, 놀이의 시간은 어느새 시험의 시간이 되어버린다.

나는 그날 문득 멈춰 섰다.

‘피구를 위해 필요한 준비는 과연 무엇일까?’

공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하지만 마음은?

이 단순한 게임은 실은 아주 깊은 철학적 구조를 지닌다.

공을 피하지만, 맞을 수 있는 게임. 이길 수도 있지만, 질 수도 있는 게임.

현실의 모든 장면이 그렇듯, 놀이 역시 불확실성과 함께한다.

그 불확실성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아이들은 ‘놀이’가 아니라 ‘통제되지 않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새로운 규칙 하나를 제안했다.

“얘들아, 오늘 피구를 하려면 ‘입장권’이 필요해. 종이나 티켓이 아니라, 너희의 마음으로 말하는 입장권이야.”

아이들은 당황했다. “말로 하는 입장권이요?”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피구를 하기 위해 필요한 준비물엔 공도 있지만, 마음도 있어야 해.
공에 맞을 각오, 질 수도 있다는 각오. 그 마음의 준비가 오늘의 입장권이야.”

잠시 정적이 흐른 뒤, 한 아이가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럼요! 저는 공에 맞을 각오도 했고, 우리 팀이 질 수도 있다는 것도 알아요!”

그 순간, 나는 마음속에서 조용히 박수를 쳤다.

입장권은 하나의 상징이었다.

놀이에 진심으로 참여하기 위한 내면의 선언, 존재의 태도를 드러내는 방식.

아이들은 줄을 서서 하나씩 자신만의 입장권을 말로 건넸다.

그 말들 속엔 단단한 자아의 윤곽이 숨어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이 ‘입장권’은 반 전체에 새로운 언어로 퍼졌다.

#모래에 묻힐 각오의 모래놀이 입장권

#정리할 각오의 자유놀이 입장권

#이해할 각오의 친구놀이 입장권

입장권은 계절처럼 변했다.

가을이 깊어질수록 아이들과 나누는 질문도 점점 더 철학적으로 무르익었다.

첫째 날, 나는 이렇게 물었다.

“가을이 와서 은행잎이 노랗게 변했잖아. 선생님도 변하는 게 있을까?”

아이들은 즐겁게 손을 들며 말했다.

“선생님은 귀걸이가 매일 바뀌어요!”

“선생님의 사랑은 날마다 커져요!”

“선생님은 매일 더 예뻐져요!”

둘째 날, 나는 질문을 바꾸었다.

“그런데 가을이 되어도 나뭇잎 색이 변하지 않는 나무도 있어. 사철나무, 소나무처럼 말이야.

그럼 선생님은 어떤 게 변하지 않을까?”

잠시 고민하던 아이들의 답은 마치 짧은 시처럼, 때로는 위트 있게 흘러나왔다.

“선생님의 이름은 변하지 않아요.”

“선생님 눈썹은 언제나 새까맣거든요.”

“선생님은 계속 예뻐요.”

아이들은 변함없는 것에 사랑을 담아 말했고, 그 말들은 따뜻하고 단단하게 마음에 남았다.

셋째 날, 나는 가장 근원적인 질문을 던졌다.

“이번엔 너희가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을 말해줘.”

그때 나온 말들은 하나의 선언 같았다.

“내가 장난치는 건 변하지만, 선생님을 사랑하는 건 변하지 않아요.”
“엄마의 다이어트는 변하지만, 내가 유치원을 기억하는 건 변하지 않아요.”
“나의 실수는 변하지만, 친구가 소중하다는 마음은 그대로예요.”
“놀이는 매일 바뀌지만, 놀 때 시간이 빨리 가는 건 항상 같아요.”

이 얼마나 맑고도 명료한 자기 이해인가.

아이들은 이미 ‘나는 변하는 존재이지만, 나에게도 변하지 않는 본질이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철학이라 부르는 것의 출발점인지도 모른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입장권은 단지 놀이의 허가증이 아니었다.

그것은 존재의 방식을 선언하는 의식이었다.

우리는 종종 삶에서 ‘변화’에 휩쓸리거나, ‘불변’에 집착한다.

그러나 아이들은 그 둘 사이의 어딘가에서 균형을 찾아낸다.

변화를 받아들이되, 중심은 잃지 않는 일.

그것이 바로 인간다움이고, 교육의 본질이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에게 되묻는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입장권은 무엇인가?

오늘의 삶에 입장하기 위해, 나는 어떤 마음으로 그 문을 열고 있는가?

실패해도 괜찮다는 용기, 상처를 감수하더라도 사랑할 의지,

그리고 아이들처럼 변화 속에서 중심을 지키는 신념.

삶은 매일 우리에게 입장권을 요구한다.

그 입장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말과 태도로 제출되어야 한다.

오늘도 나는,

겸손의 마음으로 그 입장권을 꺼내어 본다.

작은 손들이 가르쳐준 그 방식 그대로.

가볍게, 그러나 진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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