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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교사, 질문을 만나다.

선생님은 너한테 어떤 존재이니?

by 유쾌한 철옥쌤

어릴 적 내 놀이터는 들판이었다. 논과 밭이 어우러진 풍경 너머로 배 과수원이 보였고, 우리는 젓가락만 한 나뭇가지를 마이크 삼아 노래를 불렀다. 나는 전영록의 노래를, 함께 놀던 언니는 조용필의 노래를 좋아했다. 영록파와 용필파로 나뉘었던 그 시절, 지금도 조용필의 노래를 들으면 그 언니의 맑은 얼굴이 떠오른다.

어느 날 문득 조용필의 <어제, 오늘 그리고>라는 노래를 다시 듣게 되었다. 단순히 추억 속 멜로디로 다가오지 않았다. 가사 속 문장들이 질문처럼 내 안을 파고들었다.

> 어제 우리가 찾은 것은 무엇인가

> 잃은 것은 무엇인가

> 버린 것은 무엇인가

> 오늘 우리가 찾은 것은 무엇인가

> 잃은 것은 무엇인가

> 남은 것은 무엇인가

나는 그 질문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삶 속의 질문들, 특히 교사로서 내가 해온 질문들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질문은 삶의 방향을 정하는 나침반이다. 어떤 질문을 품느냐에 따라 그 삶의 무게와 깊이가 달라진다. 유아의 삶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삶은 놀이라는 이름의 여정을 통해 배우고 성장해 간다. 그리고 그 여정에서 만나는 질문이 바로 배움의 씨앗이 된다.

버린 질문들 – 교사의 언어를 되돌아보다

나는 지금까지 어떤 질문을 해 왔던가? 그중 무엇을 버렸고, 무엇을 간직하고 있을까?

버린 질문 중에는 ‘유명무실형’이 있다. 겉으로는 질문처럼 보이지만, 실은 아이에게 아무런 선택권도, 사유의 기회도 주지 못하는 말들이다.

“선생님이 몇 번이나 말했어요?”

“지금 뭐하는 거예요?”

“누가 교실에서 뛰어요?”

이런 질문들은 아이에게 존엄을 묻지 않는다. 다만 통제와 확인의 기능만을 수행할 뿐이다.

또한 ‘Yes or No형’도 있다.

“정리했어요? 안 했어요?”,

“여기서 뛰면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답은 정해져 있고, 아이는 그 틀에 맞추어 대답해야 한다. 아이의 사유는 그 안에서 갇히고 만다.

그리고 ‘번아웃형 질문’이 있다.

“왜 이렇게 오늘 정리를 안 해요?”,

“여기 다 쏟으면 어쩌자는 거예요?”

이건 사실 질문이 아니다. 나의 피곤함과 속상함이 묻어난 하소연일 뿐이다.

이런 질문들은 결국, 교사의 말이 아이에게 닿지 못한 채 공중으로 흩어지는 ‘존엄 없는 말들’이었다.

찾은 질문 – ‘너에게 나는 어떤 존재니?’

그러던 중 나는 아주 다른 질문을 하나 발견했다. 그것은 “너에게 나는 어떤 존재니?”라는 물음이었다.

발달심리학자 고든 뉴펠드는 이렇게 말한다.

“좋은 교사의 핵심은 아이에게 무엇을 해주느냐가 아니라 어떤 존재이냐에 있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나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리고 그 다음날, 유아들에게 이 질문을 그대로 던졌다. 단 둘씩 불러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님은 너에게 어떤 존재야?”

놀랍게도 두 아이 모두 같은 말을 했다.

“좋은 존재요.”

나는 그 말이 주는 무게에 가만히 숨을 멈췄다. 그리고 이어진 활동에서 ‘좋은 존재’가 어떤 느낌인지 사진으로 골라보게 했더니, A유아는 ‘양팔저울’을, B유아는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골랐다.

A유아는 말했다.

“선생님은 저를 한 단계 올라가도록 도와주는 분이라서 좋아요.”

B유아는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은 별처럼 빛나고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존재에요.”

나는 그 순간, 내가 던진 질문보다 훨씬 깊은 세계를 유아들이 보여준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이 가진 내면의 우주가 나를 넘어서고 있었다.

다른 유아들도 스스로 사진을 골라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 어떤 아이는 음식 사진을 골라 “선생님은 매일 우리에게 밥을 줘서 고마운 존재”라 했고, 또 다른 아이는 돌고래 점프 사진을 고르며 “함께 놀아줘서 즐거운 존재”라 했다.

질문은 존재를 가꾸는 도구

나는 깨달았다. 질문은 단순히 지식의 문을 여는 열쇠가 아니라, 존재의 의미를 조율하는 저울이자, 관계의 온도를 잴 수 있는 온도계라는 것을.

교사가 유아에게 어떤 존재인지 묻는 일은, 유아의 입장에서 자신의 삶과 만남을 되돌아보게 하고, 동시에 교사로서의 나를 돌아보게 하는 일이기도 했다.

좋은 교사는 자기를 보라고 다그치지 않는다. 자기를 넘어서도록 조용히 격려할 뿐이다. 하지만 그 격려조차 하지 않아도 유아는 어느새 나를 넘어선다. 존재를 향한 진심 어린 질문 하나만으로도.

존엄은 질문에서 시작된다

유아는 삶 전체로 대답한다. 말로만이 아니라 표정으로, 놀이로, 관계 속 작은 몸짓으로. 그리고 교사는 질문으로 유아의 세계에 들어간다.

존엄이란 어쩌면, 누군가에게 “너에게 나는 어떤 존재야?”라고 묻고, 그 대답을 진심으로 기다릴 수 있는 마음이 아닐까?

나는 이제 안다. 교육은 지식을 주입하는 일이 아니라, 존재와 존재 사이에 질문을 놓고 함께 응시하는 일이라는 것을.

그 질문은 곧 관계이고, 존엄이며,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교육의 가치이다.

이 문장을 마무리하며, 나는 오늘도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지금 어떤 존재로 아이들 곁에 있는가?
그리고, 나는 어떤 질문을 삶 속에 품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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