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없는 곳으로의 여행

by 리하




언젠가 필요할 것 같아 사두었던 착즙기를 꺼냈다.

레몬과 케일, 당근과 사과를 차례로 밀어 넣었다.

투명한 용기 안에서 칼날이 돌아가고, 단단하던

껍질들이 부서지며 과육의 경계가 허물어졌다.


제각기 선명했던 빛깔들이 엉키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주황과 노랑, 짙은 초록은 서로를 집어삼키다 이내 구정물과 닮은 모호한 색으로 변해갔다.


그 칙칙한 액체를 바라보는데, 내가 고르지 않은 색들로 채워져 있던 나의 유년이 떠올랐다.


어린 시절의 나는 부모의 표정을 살피는 일에 익숙했다.

내가 가고 싶은 곳보다 엄마가 정해준 장소가 우선이었고, 발의 편안함보다 엄마가 골라준 신발의 색깔이 중요했다.


십 대가 되어서는 친구들 사이에 섞이기 위해 애썼다.

취향과는 상관없는 유행하는 가방을 메고 비슷한 점퍼를 입으며, 집단에 소속되었다는 사실에서 오는 안도감에 기댔다.


사회에 나와서는 쭉 그래픽 디자이너로 근무했는데,

직업의 특성상 유행의 앞단에 서 있어야 했고,

주변에는 늘 감각적인 동료들이 가득했다.


나는 뒤처져 보이지 않으려 매일 나를 치장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여유 있는 표정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타인의 문장을 필사하듯 살아온 시간 동안 나의 채도는 자꾸만 낮아졌다.


착즙기 속에서 짓눌린 과일들처럼, 나 또한 세상의 요구에 휘둘리며 나만의 고유한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타인의 기준에 맞춰 나를 수선하던 그 공임은 결국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다. 남들이 좋다는 것을 손에 넣고 나면, 그 자리는 성취감이 아니라 다른 이의 취향으로 점령당한 뒤의 피로함으로 채워졌다.


나를 버리고 얻어낸 인정은 유통기한이 짧았고,

그럴수록 나는 더 허둥대며 타인의 입맛에 맞는

색들을 나에게 덧칠했다. 내가 아닌 모습으로 누군가를

만족시키는 행위가 얼마나 공허한 공정(工程)이었는지,

내 마음의 모서리가 닳고 나서야 깨달았다.


서른이 넘어서야 나는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타인의

시선을 끊어냈다. 이제는 새로운 것을 채우기보다

내 안에 잠들어 있던 취향을 발굴하는 재미를 알아간다.


오래전 읽다 만 책을 다시 펼쳐보고,

외출 전 고집스럽게 자스민 계열 향수만을 뿌리는

사소한 고집들이 나는 좋다.


와중에 깨달은 사실들도 있다.

가장 편안하다고 믿었던 사람이 사실은

나를 가장 불편하게 만드는 존재였음을 알게 되었고,


여행을 갈 때는 내가 관광지보다 휴양지를 더 선호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화창한 날보다는 비 오는 날의 낮게 가라앉은 회색빛

하늘을 보는 걸 좋아했다.


나도 모르던 내 모습의 조각들을 서른이 넘어서 하나둘 발견해 나가는 일은 꽤 뿌듯한 만족감을 주었다.


이토록 주도적인 삶을 살고자 애쓰는 이유는

나를 쏙 빼닮은 나의 아이 때문이었다.


내가 나로서 온전히 서 있는 뒷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이다. 내 딸만큼은 나의 유년과는 다르게 타인의 시선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만의 빛을 선명하게 발현하며

살아가기를 바라서이다.


더 이상 내 삶은,

타인의 문장을 필사하는 연습장이 아니다.


나는 마음을 새 모양으로 접어 될 수 있는 한 아주 먼 곳으로 날려 보냈다. 아파트 사이사이 건물을 피해

비행하던 새는 아쉬운 듯 몇 번을 돌아보더니 이내

멀리 날아갔다.


나는 그 새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창밖을

바라보았다. 정해진 정답을 채워야 한다는 강박을 덜어낸 자리에는 내가 좋아하는 회색빛 하늘처럼 차분한

여유가 고였다.


그곳엔 더 이상 누구의 기색도 남아 있지 않았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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