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될 때 전 해 연도를 습관적으로 적던 나, 돌아가고 싶었던 걸까
우연히 박나래가 김숙에게 '나 어떻게 살아야 해? 마흔을?'라고 물었더니 김숙이 이렇게 대답했다.
마흔? 너무 예쁠 나이야.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도 아닌 나는 그 말을 듣고 눈물이 났다. 막연하게 두려워하는 부분을 짚어준 것 같았다. 물론 열심히 산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일 수 있다. 하지만 아직 어린 내가 나이 드는 것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데 위로를 받은 것 같아 속절없이 울었다. 쌓아둔 게 없어서 나를 책망하고 채찍질만 했다. 원망하고 후회하기보다는 지금이라도 쌓아가야 할 시점이다.
정신과 약의 장점은 나를 울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준다. 솔직하지 못하고 알아채지 못하던 나의 불안함을 캐치할 수 있게 해 준다. 공허하고 슬프고 우울한데 눈물은 나지 않아 해소되지 않던 감정들을 털어내고 정비할 수 있게 된다. 우울하고 죽고 싶던 10대의 마지막 시절로 돌아가라고 한다면, 나 또한 지금이 낫다고 돌아가지 않을 거다. 지금의 나는 아파보았기에 이만큼 자랄 수 있었다. 헛된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어느 날 갑자기 행복이 뭐지?라는 의문을 가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껏 살면서 즐거웠던 기억은 분명 많았지만 행복하다는 감정을 느낀 적이 있나 싶었다. 내가 성인 ADHD라는 걸 알고난 후에 알아차린 건 기억하는 기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는 거다. 뒤돌아서면 물건을 어디에 두었는지 습관적으로 있던 자리에 두지 않으면 찾지 못했다. 이러한 특징은 감정면에서도 나타났다. 나의 감정선은 대나무통에 흘러내리는 국수처럼 잡을 수 없었다.
언제부턴가 네잎클로버보다 세잎클로버가 좋아졌다. 행운 또한 행복할 때 찾아온다. 아직까지 행복이란 감정은 잘 모르겠지만 길에 흔히 널린 행복을 주어다 끌어안고 싶다. 클로버가 모인 꽃다발을 하나 받으면 그게 행복이겠지.
1인분을 하고 싶어 1인분 어치의 평범한 삶을 위해 고군분투하며 사는 삶이 처음에는 원망스러웠다. 그걸 못해서 어린 시절부터 박탈감만 느끼며 살아왔다. 20대도 절반에 가까운 시간을 버리고 나서야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 우물 안 개구리인 나는 개중에조차 잘나지 못했다. 평타조차 안 됐다. 그 아늑한 울타리 속에서 현실을 부정하고 살다가 마주친 세상은 상상보다 더욱 넓었다. 어렸을 때 배웠어야 했던 생활 속 작은 성공이란 데이터베이스가 없어서 많이 굴렀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개운함은 생각보다 달콤하더라.
객관적으로도 나는 어린 나이다. 스스로 조급해지니 어리지 않은 나이라고 치부했다. 어린 사람들 사이에서나 늦은 나이지 조금만 부지런해진다면 충분히 무언가 시작하기 좋은 나이다. 주변 친한 50~70대 이모들 사이에서 애기 취급을 받을 때 난 충분히 예쁠 나이라고 다시금 깨닫는다. 물론 중년 또한 충분히 예쁜 나이지만. 난 이모들이 참 좋다. 100세 시대인 지금 늦은 나이가 어디 있겠는가. 조급함을 동시에 갖고 있는 모순적인 나라도 이건 변함없는 사실이다. 늦은 나이라는 건 없다. 왜, 수영장 가면 제일 고인물은 할머니들이다. 잊지 말자.
이제야 나를 사랑해보려 하는 나에게 칭찬해주고 싶다. 운동도 열심히 나가기 시작했고 시간을 허투루 써도 괴로워하기보단 휴식이라는 말로 포장했다. 최대한 효율적으로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잠깐 비는 시간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시키고 그림이라도 그리려 아이패드를 꺼내 들었다. 두려워하지 말자. 담대해지자. 겁이 많은 나에게 세뇌처럼 말해줘야 잊지 않을 거다. 열심히 기도하고 옆 사람을 사랑하자. 실패로 가득 찼던 나의 마음을 희망으로 바꿔두자. 나는 아직 자라고 있다. 배울 세상이 너무 광활하다. 행복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