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크티 쉬폰 케이크를 한 판 올리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건배사를 외쳐야지
만약에 내가 세상을 떠났을 때 나를 위해 울어줄 사람은 몇이나 될까. 나 때문에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것으로 사랑을 증명받고 싶다. 하지만 이미 없어 확인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기에 아무래도 이 플랜은 실행이 어렵다.
종종 나의 죽음을 바란다. 사실 꽤 자주 바란다. 아픈 걸 원하는 가학적인 사항들이 아니라 정말 내가 먼지처럼 사라지길 원한다. 불가능하니 죽음을 바라는 거다. 나 자신이 꼴 보기 싫지만 나는 스스로를 버릴 수 없다. 때문에 유일한 방법이어서 바랐을 뿐이다. 책임지기 싫어하고 아직까지도 방황하는 내가 너무 미워서 견디기 어렵다. 남들의 반만 해도 내가 소원이 없겠다.
쉽게 눈물을 흘리기도 싫다. 악을 쓰며 소리치고 청승 떨고 싶지만 누군가 볼까 속으로 나를 여러 번 죽였다. 쉽사리 이해받을 수 없는 이 행동들은 사회의 기준에 넘어섰기 때문에 나는 꽁꽁 숨긴다. 모든 감각을 차단하려 노력한다. 결국 내가 스스로에게 솔직해지지 못하고 괜찮은 척 무너지고 있다 해도.
유난을 떨며 끊임없이 리마인드를 할 때에도 빠른 세상은 끝없이 움직인다. 도태되고 도태되어 TV에 나와 악마의 편집으로 먹히기 좋은 먹잇감이 된다. 왜 저렇게 살지? 싶어지도록.
늦어지는 약 타이밍 때문이라고 치부하고 열심히 약을 삼켰다. 울렁거리는 속에 약을 넣으니 위는 토하라고 아우성친다. 혼자 작은 방에 들어가 심호흡을 열심히 하다 보면 울고 싶어 진다. 뜬금없이 사연 있는 사람이 되지 않으려 표정을 갈무리 친다. 뭐, 애초에 어떠한 표정을 지을만한 에너지도 없지만.
아, 이런 감상적인 글을 쓰고 싶지 않았다. 사랑을 몰라서 베풀지 못하는 자가 신세한탄 하듯이 말한 글은 더욱이 쓰고 싶지 않았다. 내 그릇은 너무나 작다. 나조차도 포용하지 못해서 이러고 있는 게 너무 싫다. 나중에 이 글을 흑역사라며 읽고 있을 내가 그려진다. 차라리 그렇게 웃었으면 좋겠다.
문득 생각이 든다. 내 장례식을 내가 꾸미고 미리 작별인사를 할 수 있다면 어떨까. 밀크티 쉬폰 케이크를 크게 한 판 들여놓고 초에 불도 붙인다. 이걸 축하한다고 해야 할지 잘 지내라고 해야 할지 애매한 상황에 다 같이 박수를 치는 거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을 잔뜩 들여두고 뷔페를 차려둘 거다. 지나가듯이 알던 사람들끼리 음식을 담다가 마주치면 잘 지냈냐고 안부도 묻겠지. 그 장면을 보면서 나는 울지 않고 미소 지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랬으면 좋겠다. 나를 추억해 줬으면 좋겠다. 나는 너무 큰걸 바란다.
그냥 소중한 사람에게 기억되고 싶다는 이기심이 들 때마다 혹시 내가 연애하고 싶나? 의심한다. 결코 그런 것만의 문제는 아님을 알면서도. 이건 내가 스스로 극복해야 하는 문제다. 위로는 받을 수 있겠지만 너무 많은 양의 위로는 밴댕이 소갈딱지님께서 동정으로 착각할 수 있으니까. 담백하게. 그냥 안아줬으면 좋겠다.
난 스킨십을 좋아한다. 연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친구한테도 매미처럼 붙어있는 걸 좋아한다. 그 포옹에서 오는 가득 차는 마음이 좋다. 어릴 때 슬플 때면 큰 인형을 끌어안고 그 인형을 토닥였다. 나는 나에게 위로를 선물했다. 아무도 해줄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이제 바라지도 않는다. 애정이 어색해 내가 피할 것 같아서다.
한 뮤지컬 영화를 봤다. 지금 꽤나 흥행 중이다. 나는 사랑의 형태 중 하나가 우정이라 생각한다. 두 친구의 우정을 바라보며 사연이 있는 사람처럼 울었다. 다른 신념을 가지고도 그저 그 사람의 행복을 바랄 수 있을까. 그 신뢰는 눈물 나게 슬펐다. 울면서 친구에게 말하니 그 친구가 말하기를, '그건 슬픈 게 아니라 감동받은 거 아니야?'라며 굳이 정정해 주더라. 아오. 그래, 감동도 받고 슬프기도 했다. 난 그 뮤지컬 넘버가 그런 내용인 줄 몰랐다고.
두 번 보는 내내 울었다. 내가 느낀 모든 감정은 나의 결핍에서 오는 거일 수 있다. 나에게 부족한 면을 남에게서 보는 게 싫을 수도 있고 부러울 수도 있다. 물론 음악이 주는 감동도 있지만. 이분법으로 나눌 수 없는 사람은 참 복잡하고 섬세한 감정을 가졌다. 명확할 때의 장점도 있겠지만 단점도 있지 않을까. 장점은 눈으로 나를 목격할 수 있는 즐거움도 있겠다. 왜 사람들이 성격유형검사에 열광하겠는가. 나를 알아간다는 건 슬프면서도 즐거운 일이다.
나는 나의 죽음을 바라면서도 살아가기를 원한다. 힘차게 나아가기를 원한다. 사실을 진심으로 살고 싶다는 거일지도 모른다. 그저 도망치고 싶었던 것 같다. 무작정 책임이 당연해진 어른이 싫어서. 늙어가는 게 두렵다가도 내가 어떻게 늙을지 상상이 가지 않아서 궁금해졌다.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었으면 좋겠다. 그때의 나는 어떤 평가를 받을까. 적어도 지금처럼 바보같이 살아가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외쳐야지. 야, 나 아직 살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