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져 버린 그림을 아시오?

스며드는 것

by 스물여덟

한편 한국 전통 그림들은 물감을 묻히지 않는다. 스며든다. 먹은 화선지에 번져 섬유를 물들인다. 섬유와 하나 된 먹은 종이가 썩어 문드러질 때까지 함께 있는다. 이는 천에 묻혀 떨어지는 서양화와는 다르다.

이는 변하지 않는 정신을 추구했던 조선의 그림과도 일면 맞닿아 있다. 서서히 스며드는 것, 합쳐지는 것, 흔들리지 않는 것.

그러나 서양은 대항해시대, 산업혁명을 거치며 자연을 정복했고, 그들이 몰고 온 물보라에 화선지는 젖어 먹물은 씻겨내렸다. 종이에 스며들었기에 종이에서 씻겨져 나온 것이다. 자연과 하나 됐던 힘찬 글씨는 세찬 물보라에 번져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남은 것은 빈 종이다. 그 위에 저마다의 나라들이 저마다의 물감을 칠했다. 그것들도 언젠가 떨어지고 갈라지겠지. 그러나 우리는 잊으면 안 될 것이다. 종이에 써져 있던 힘찬 그림을.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모래로 된 과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