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물여덟 Aug 09. 2023

제목이 없습니다.

소제목도 없습니다.

제목을 짓는다는 건 힘든 일이다. 글의 내용이 한눈에 들어와야 하고, 내용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어야 하며 연관이 있어야 한다. 물론 노래 제목을 짓는 일도 그렇다. 때로는 제목이 떠오르지 않아 한참을 끙끙 앓은 적도 있었다. 노래 제목 하나를 2주 동안 생각한 적도 있으니까.


서술한 내용으로 알겠지만, 글이나 노래가 완성된 후 제목을 짓는 편이다. 제목을 짓고 창작하면 제목이라는 프레임에 그들을 잘라내 가두는 것이라 느낀다. 그렇게 잘려 나갈 생각도 내 생각이기에 일단 써 내린다. 하지만 늘상 자르지 않았고 그림은 커졌다. 틀을 바꾸고 제목도 덩달아 바꾼다. 제목을 5번째 바꿀 때쯤 깨달았다. '아 나는 제목을 정하고 글을 쓰면 안 되는구나.'


말하고 싶은 모든 내용을 쓰다 보면 짧은 문장, 읽기 쉬운 문장, 글 전체의 유기성 등 틀 안을 가득 채우는 그림보다 여백 가득한 붓질에 가까운 그림이 나온다. 꽉 들어차지 않았기에 같은 붓질을 해도 더 큰 액자가 필요하다. 그리하여 제목이 추상적으로 지어지는 경우가 많다. 때론 튀어나온 그림을 잘라내어 콜라주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얼마나 멋지던지. 나는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다.


'사람은 이름대로 산다.' 들어본 어구인가? 이 문장에 대해 이렇게 생각한다. 평생 이름을 불리면서 살게 되면 무의식 깊은 곳에 그 이름이 새겨지고 중요한 판단을 내릴 때 이름에 걸맞은 행동을 하게 된다고. 이는 예언도 마찬가지다. 믿건 믿지 않건 뇌리에 새겨져 행동을 유도한다. 그렇기에 '이름대로 산다'는 것이다. 그럼 내 작품도 제목대로 살까?


때론 전혀 관련없는 이름으로 지을 때도 있다. 한번은 사랑 노래에 얼룩말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듣고 당황하는 친구의 표정이 눈에 선하다. 이는 제목으로 판단되지 않았으면 하는 작은 심술 때문이다. '이번 얼룩말 노래 잘 들었어. 창의적이던데?' 제목만 보고 판단한 친구들도 있었다. 바쁘기에 어쩔 수 없다지만 내용으로 판단되고 싶다는 건 심술일까?


이름이 없다는 것도 이름이 되어버렸다. '무제' 무제조차 제목이 되었다. 지드래곤의 노래가 생각난다. 이름이 없는 것은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비루한 것들뿐이다. 무제조차 브랜드가 되어버린 지금 나는 무슨 제목을 지어줄 수 있을까? 


혹은 너무 가벼이 이름을 짓는 것은 아닐까? 작품을 처음 보는 사람에겐 이름이 전부일텐데. 자녀들에게 지어줄 이름을 고심하는 것처럼 그림에 딱 맞는, 여백 없는 맞춤 액자를 생각해 내야 할까? 내 글들에 미안해지는 날이다. 더 좋은 이름을 붙여주지 못해서 미안해.

매거진의 이전글 인간의 맹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