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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르는강물처럼 Mar 15. 2023

시각과 청각은 젓가락이다 -1

감각 - 그 참을 수 없는 무거움

청후미촉. 오감각 중 하나만 두고 나머지를 포기해야 할 상황에 처하면 우리는 어느 감각을 지키려 할까? 

아마 대부분은 이의의 여지없이 시각을 선택할 것이다. 시각을 통한 정보가 가장 해석이 쉽고 빠르게 처리되기 때문이고 첫눈에 반할 운명의 상대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의 다섯 감각 가운데 80% 이상을 시각에 의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고, 80%를 잃으면 거의 다를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청각 역시 풍부한 정보를 받아들일 수 있는 감각이다. 시각을 잃으면 나머지 네 감각이 시각이 하던 역할을 떠맡아야하는데 그중 청각이 가장 큰 역할을 하게 다. 청각 상실에도 불구하고 불후의 명곡들을 지어낸 베토벤을 흠모하는 이들은 예술적 이유로 청각을 선택을 할지도 모르겠다. 헬렌 켈러는 "보지 못하는 건 사물과의 단절이지만 듣지 못하는 건 사람과의 단절이다."라고 했다. 청각상실은 단순히 듣지 못하는 것 이상의 어려움을 가져다 준다는 뜻이다. 여러가지 이유로 오감각 중에서 시각이나 청각 중 하나를 선택하는 이가 대부분일텐데 우리의 목숨을 지키는데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주는 기본 감각이라는 게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세렝케티 초원의 가젤영양은 사자에게는 맛있는 사냥감이다. 사자는 자신이 찍은 사냥감에게 최대한 가까이 접근해서 덮쳐야 맛있는 식사를 즐길 수 있다. 아주 미미한 바람일지라도 그 방향을 파악한 다음 자신의 냄새가 사냥감에게 전달되지 않는 위치를 정해야 한다. 몸을 최대한 낮추어 기듯이 접근하여 사냥감이 자신을 보지 못하게 해야하며, 고양잇과 동물 특유의 사냥술인 발톱숨기기와 부드러운 발바닥으로 사냥감이 자신이 접근하는 소리를 듣지 못하게 해야 한다.


반면 가젤영양은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천적의 접근을 되도록 빨리 알아야 목숨을 지킬 수 있고 초원의 신선한 풀을 오래도록 즐길 수 있다. 자연으로부터 받은 명령이자 약속인 '번식'도 살아 있어야 해낼 수 있는 것이다. 시각 청각으로 천적의 접근을 미리 감지해내는 레이다망이 없으면 기습공격하는 일본의 제로센 전투기들에게 무참하게 당하는 하와이 진주만의 전함 신세가 되기 쉽상이다.  


진화론에 입각해서 말하자면, 인류는 진화에 진화를 거쳐 현생인류 호모 사피엔스로 등장하여 사회적 동물로서 군집을 이루고 호모 이코노미쿠스, 호모 폴리티쿠스로서 경제적, 정치적 활동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인간보다 하위수준의 동물과 곤충처럼 시각과 청각으로 받아들인 정보를 해석해내어 생존해나가는 방식은 지금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진화를 거듭하여 업그레이드 됐을지라도 기본 방식에는 변함이 없다. 시각 청각이 없이는 사자에게 먹히는 가젤영양일 수 밖에 없고, 갑옷을 잃어버린 기사일 뿐이다.  




시각과 청각은 젓가락이다.

둘은 젓가락과 같아서 하나가 없으면 남은 하나는 제구실을 못한다. 하나가 없으면 반이 없는 게 아니라 모두가 없는 것이거나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반을 회복하기 위한 정도의 노력이 아니라 열배 스무배의 고난이 따를 수도 있다. 무성영화는 변사(무성영화 극장의 해설사)가 있어서 스토리텔링 예술이 될 수 있었고, 명작동화책은 삽화가 있어서 아이들의 사랑을 받는다. 시청각교실이 가장 훌륭한 교실이 되는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줄탁동시적 궁합이 필요한 두 감각이다.


심청이는 장님 홀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인당수 깊은 바다물에 뛰어들어 목숨을 던졌다. 

시대적 판단으로는 지나친 효심같지만 앞을 못보는 장님이 막대기를 눈 삼아 동냥젖으로 갓난 딸을 키워냈으니 심청에게는 아버지는 자신을 낳아준 생명의 근원이자 목숨의 은인이다. 장님은 아니지만 다리가 불구인 아버지의 다리를 낫게 하려 인당수에 뛰어들었다면 억지효녀 심청이겠지만 심청의 아버지는 다름아닌 시각이 없는 사람아닌가. 시각을 잃는다는 것은 본인은 물론 가족에게도 한이 되는 일이다. 눈먼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효심을 다하여 보살피면 되겠지만 아무리 딸일지라도 아버지의 눈이 되기에는 부족하다고 심청은 생각했을 것이다. 그보다는 차라리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 아버지의 시각을 찾아드리는 게 더 낫다고 여겼을 것이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도랑에 박히고, 문틀에 이마를 찧으면서도 딸을 지켜낸 아버지의 시각을 찾아드리려 했으니 심청이 효녀 중 으뜸 효녀가 된다는 얘기는 스토리텔링의 충분조건이 되는 것이다.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는 소설가 이청준의 단편소설을 원작으로 하여 만들어진 동명의 영화이다. 

소리꾼 유봉은 양딸 송화에게 소리를 가르치며 자기에게서 도망가지 못하게 하고 또 소리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약을 먹여 송화의 시력이 점점 사라지게 만든다. 시각을 잃어버린 한이 소리로 터져나오기를 바란 것이다. 다름아닌 시각을 찾아주려한 효심이었으니 '효녀 심청'으로 존재할 수 있듯이, 다름아닌 아버지가, 다름아닌 딸의, 다름아닌 시각을 빼아았으니 한에 사무치고 그 한이 악으로 비통으로 원망으로 소리가 되어 화산처럼 불처럼 터져나오게 되고 큰 소리꾼이 된다는 설정도 공감을 얻기에 충분하다. 옆집 아저씨가 내 다리를 분질렀다는 것과 같은 평범한 얘기는 아니지 않은가? 물은 불을 끄는 구실을 하지만, 물을 분리해서 수소와 산소로 나누면 둘 다 불이 잘 붙는 가연성 물질이 된다. 시각과 청각이 온전하면 물이 되지만,  청각이 없는 시각, 시각이 없는 청각은 불처럼 타올라 한으로 맺힐 수 있는 것이다.


청각이 없는 시각, 시각이 없는 청각이 한이 된다하지만 헬렌 켈러는 두 살 때 시각과 청각을 잃어버리고 거기에다가 말까지 잃어버린 삼중고(三重苦)의 고통을 당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녀의 글을 보면 시각과 청각을 잃은 사람이라면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시각과 청각에 대한 표현이 넘쳐난다. 그래서 헬렌 켈러의 말과 글은 단순한 말과 글이 아니라 한마디 말 하나의 문장일지라도 풀무불의 뜨거움 속에서 제련된 금은과 같은 것이었다.


나이아가라 폭포를 방문하고 난 뒤, 헬렌켈러는 다음과 같이 나이아가라 폭포에 대한 소회를 이렇게 밝힌다.

 내가 나이아가라 폭포가 준 놀라움과 아름다움에 감동받았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긴다. 그들은 묻곤 한다.
 
"당신은 지금 대자연의 아름다움과 음악 운운하는데 대체 그 모두가 당신에게 무슨 의미란 말입니까? 솔직히 일렁이는 파도를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으르렁거리는 포효를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대체 당신이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건가요?"

보았으면 또 들었으면 다 안 것인가. 다 설명한 것인가.
사랑이 무엇이며 종교란 무엇이고 또 선함이란 어떤 것인지 설명하는 것이 어려운 만큼이나 나이아가라, 이 대자연의 스스로 그러함을 설명하기 어려운 건 피차 마찬가지 아닐까


이 말을 하는 순간, 헬렌켈러는 플라톤의 <이데아(idea)>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들이 '본' 나이아가라 폭포와 헬렌켈러가 '본' 나이아가라는 분명 다르다. 헬렌켈러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없었으니 분명 거대한 폭포가 일으키는 바람을 피부로 느꼈고 엄청난 양의 물이 내는 습한 기운을 냄새로 맡았을 것이다. 질문을 한 그들은 시청각으로 직관적으로 보고 들은 것이었고, 헬렌켈러는 느낌으로 느낀 것이었다.  

플라톤의 이데아론 - 동굴의 비유
플라톤은 <이데아>론으로 세계를 둘로 나누어 보았다.  
첫 번째 세계(a)는 우리가 감각을 통해서 알 수 있는 현상의 세계, 감각적 사물의 세계이고,    
두 번째 세계(b)는 정신의 사유를 통해서 접근할 수 있는 이념의 세계이다. 이 이념의 세계는 근원적인 형태의 세계로 이루어진 것으로 현실의 감각적 세계를 있게 하는 존재의 근원이다.   


폭포의 경우를 예로 들면, 세상에는 수많은 폭포들이 있다. 하지만 그 폭포들은 넓이 모양 높이 등이 서로 조금씩 다르다. 이구아수 폭포가 다르고 나이아가라폭포가 다르고, 빅토리아 폭폭가 다르다. 제주의 정방폭포가 다르다(a). 플라톤은 이러한 다양한 폭포는 기본적으로 완전한 폭포라는 하나의 원형(b)을 모방한 것이라 생각한다.


헬렌켈러와의 대화에서 질문한 그들이 그들의 온전한 시각과 청각을 통해 느낀 나이아가라 폭포가 다르고, 헬렌켈러가 후미촉각을 통해 뇌 안에서 만들어낸 폭포가 다르다. 대상은 같지만 다르다.


"보았으면 또 들었으면 다 안 것인가. 다 설명한 것인가. 사랑이 무엇이며 종교란 무엇이고 또 선함이란 어떤 것인지 설명하는 것이 어려운 만큼이나 나이아가라, 이 대자연의 스스로 그러함을 설명하기 어려운 건 피차 마찬가지 아닐까."


헬렌켈러의 폭포는 현상학적인 폭포가 아니다. 그녀의 나이아가라 폭포는 다른 사람의 설명과 자신의 남은 감각인 후각 미각 촉각 그리고 영감으로 만들어낸 - 이념 세계의 폭포(폭포의 idea)에 근접한 - 나이아가라 폭포의 몽타쥬였다. 헬렌켈러는 자신과 가정교사 설리번선생님이 창조해낸 천상의 젓가락으로 보통 사람들이 맛볼 수 없는 천상의 진미를 맛본 행복을 누린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헬렌 켈러는 위대하다.


(2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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