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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르는강물처럼 Mar 15. 2023

시각과 청각은 젓가락이다 - 2

청각의 Coudeta  /  관세음보살 - 소리(世音)를 보다(觀)

(1부에서 이어진 글입니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글자를 풀어보면 세상이 내는 소리를 보는 보살이라는 뜻이다. 관세음보살은 불교에서 대중적으로 가장 친숙한 보살이며, 중생이 고난을 겪을 때 대자비심을 베풀어, 중생을 위험에서 구제하고 제도하는 보살이라고 한다.  천수천안, 천개의 손과 천개의 눈을 가졌다고 하는데 이는 천 개의 자비로운 눈으로 중생을 응시하고 천 개의 자비로운 손으로 중생을 제도한다는 것이다.


눈은 보는 시각기관이고 귀는 듣는 청각기관이다. 눈이 천개이어도 산이 가로막고 벽에 가리워져 있으면 볼 수가 없다. 깜깜한 밤이어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청각으로는 장애물이 있어도 칠흑의 밤이어도 사방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산이 가로막고 있고 어두운 밤일지라도 대자대비심의 부처는 중생의 고통을 하나라도 놓쳐서는 안되니 늘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하고( 世音) 그 소리가 나는 곳으로 눈길을 돌려야 한다(觀). 그래야 대자대비의 보살일 수 있는 것이다. 노자의 말을 빌자면,  '천망회회(天網恢恢) 소이부실(疎而不失)'이다. 관세음보살의 그물은 헐렁한 듯 하지만 세상의 소리를 놓치는 법이 없다. 눈으로 듣고 귀로 보는 시각과 청각의 공조체계가 완벽하기 때문이다.



지음(知音)

열자(列子) 탕문편 (湯문篇)에서 다음과 같은 고사가 전해진다.

춘추시대 진(晉)나라 대부 유백아(俞伯牙) 는 원래는 초(楚)나라 사람으로 거문고 명인이다. 사신으로 자신의 조국 초나라로 가던 중 고향을 찾았다. 한가위 보름달의 기운에 취해 거문고를 탔는데 나무꾼 종자기(鍾子期)가 지나가던 중 듣게 된다. 백아가 거문고를 탈 때 높은 산을 떠 올리면 종자기는 이를 알아듣고 태산과 같다 칭찬을 해주고 강물을 떠 올리며 거문고를 타면 종자기는 장강과 황하 같다며 칭찬을 해 주었다.

자신의 거문고 연주가 담은 의미를 알아주는 종자기의 말에 기쁜 백아는 종자기와 의형제를 맺었다. 그리고 다음해에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진다. 다음해 백아는 종자기를 찾아갔지만 종자기는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어 있었다. 종자기의 무덤에서 마지막 연주를 한 백아는 이제 더 이상 세상에 자신의 거문고 소리(音)를 알아주는 사람(知)이 없다며 거문고 줄을 끊어 버렸다고 전한다.

지음이란 마음이 서로 통하는 친한 벗을 일컫는 철학적인 단어이다.

기쁠 때의 웃음, 슬플 때의 울음, 세상이 나보다 작아보일 때의 교만, 화났을 때의 분노에 찬 말과 거친 행동 등. 자신이 하는 말과 행위 그로 인한 비난과 칭찬의 소리(音)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여주는(知) 친구를 말한다. 관세음의 소리가 대중의 소리라면, 지음의 소리는 한 사람의 소리이다. 한 사람과의 사이에 오가는 정으로 '연정'보다는 '우정'이 때로는 더 귀하다. 사랑의 말은 다소 교언영색(巧言令色, 남에게 잘 보이려고 그럴듯하게 꾸며 대는 말과 알랑거리는 태도)의 기운이 있지만, 우정의 말은 지음의 기운이 강하기 때문이며, 자신의 못난 것도, 자신이 들어서 불쾌할 말도 서슴지 않는 사람이 지음이기 때문이다.


귀에 쓴 소리가 자신을 바로 세울 수 있으니, 지음(知音)은 지음(building)이다. 지인은 많아도 지음을 만나기란 정말 어렵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친구를 찾기 보다 먼저 친구의 마음까지 자신이 먼저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할 일이다.


지음이 반드시 사람일 필요는 없다. 애완동물, 애완식물도 지음이다. 애지중지 돌보면서 자신의 마음이 순화되고 그들이 건강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스스로에게 덕을 쌓는 일이고 복을 짓는 일(building)이다. 무생물일지라도 아끼는 명품백이 지음이 될 수 있고 휴식을 주고 안전하게 지켜주는 집도 지음일 수 있다. 내가 그들을 대함과 그들이 나를 대함의 관계 즉 자신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성찰할 수 있는 기회, 지음의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10년을 넘게 타던 자동차를 처분할 때의 '이별감'을 누구나 느끼지 않는가. 다른 사람이 평소에 아끼던 물건을 나에게 주었을 때 물건만 내게로 온 것이 아니라 그 사람도 나에게로 함께 온 것이 아닌가.




아침고요수목원

전국 도처에 수목원은 많으나 수목원이 소재하는 지명이 이름에 들어가지 않은 수목원은 거의 없다. 경기도 가평에는 특이한 이름을 가진 수목원이 있다. <아침고요수목원>! 그 이름으로 이런 상상을 하게 만든다. 수목들이 기지개 켜는 소리, 화초가 하품하는 소리, 벌레를 잡도록 딱따구리에게 몸을 맡기는 나무의 소리, 암수 은행나무가 멀찍이 떨어져서 밀어를 나누는 소리, 이슬이 맺히는 소리, 이슬이 햇살과 연애하는 소리, 다람쥐가 볼따구 터지도록 도토리를 입안으로 밀어넣는 소리. 들리지 않는 소리가 들릴 만큼 고요한 아침을 가진 곳.


'아침고요수목원' -- '수목'이란 단어는 시각 영역에 있고, '고요'란 단어는 청각 영역에 있다. 심신의 안정이 목적이라면, 수목보다는 아침고요란 단어에 더 끌린다. 중국남북조시대에 달마는 소림사에서'면벽수행'이라 일컫는 벽을 마주보고 앉아 참선하는 수행을  9년동안이나 하였다. 면벽이라함은 시각은 재워두고 청각만 열어놓은 채로의 수행이다. 아침고요수목원을 찾아 시각보다는 청각을 통한 수행자가 되어봄직도하다. 홈페이지를 들러보니 개장 시간이 오전 11시다. 아침고요의 시간은 아니지 않은가. 그래도 지나는 길에 한 번 들러보아야겠다. 이름값은 하는지가 궁금해서다.


소리에는 내면의 소리가 있고 외부의 소리가 있다.

내면의 소리는 고요하며 바깥쪽으로 향하는 원심력을 가진 강한 에너지이다. 이성과 감성간의 치열한 논쟁이고, 도덕과 부도덕간의 전쟁이며, 논리와 비논리간의 싸움이다. 이긴 쪽은 원심력에 의해 반드시 수면 위로 부상한다. 내면의 소리가 밖으로 나올 때에 안정과 평온이 찾아온다. 솔직해진다는 말이다. 그러나, 원심력을 억제하면 전체에 진동이 생기게 된다. 표리부동, 구밀복검, 양두구육, 면종복배의 기운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반면 외부의 소리는 시끄럽고 안쪽으로 향하는 구심력을 가진 선택적 에너지이다. 듣는 이의 의지에 상관없이 고막을 자극하니 일단은 소음이다. 그러나 듣는 사람의 주관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기도 하는데, 어떤 이들은 자연이 내는 어떤 소리들을 백색소음이라 한다. 심신에 안정을 준다는 소음이다.


인간이 내는 소리에도 색깔이 있다. 관세음보살은 백색이든 흑색이든 인간사에서 생기는 모든 소리를 다 듣는 대자대비의 부처이지만 범인은 굳이 소리를 감별하려든다. 마음의 여과망이 오염되거나 이성이 마비되면 감언이설과 교언영색을 백색인 줄로 안다. 이렇게 받아들여진 소리는 내부의 소리가 되어 또 다시 원심력을 가지게 되고 표리부동, 구밀복검, 양두구육, 면종복배의 기운이 생기게 만들어 버린다.


소리를 다스릴 줄 아는 힘이 관세음보살의 덕을 입을 수 있고 지음을 얻어 풍요로운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태교

태아의 귀는 임신 28주가 지나서야 비로소 형태를 갖추지만 실제로는 '태초에 말씀이 있었던 것' 처럼 태아는 수태와 동시에 소리와 함께 있다. 임신 초기에는 자궁 근처에서 나는 엄마의 소화, 순환계의 소리 뿐이지만 중기에는 엄마의 목소리나 바깥소리에도 귀를 기울인다. 28~30주가 지난 태아는 외부 소리를 들으면 심장 박동이 빨라지거나 느려지는 등의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시각보다는 청각 발달이 먼저였다는 얘기이다.




현대미술을 낳은 음악의 소리

20세기 들어서면서 야수파와 입체파가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자, 이제 자연과 사물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은 진부한 과거의 산물로 생각하기에 이른다. 이 시점에서 그림을 순수한 점 선 면과 색채로만 표현하려는 추상미술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기 시작한다.


칸딘스키는  어느날 집에 가서 아름다운 그림을 보았다. 불타는 듯한 강렬한 색채들이 마음을 끌었다. 나중에 자신의 그림을 뒤집어 놓은 것이라는 것을 알고는 “그림이란 무엇을 그리느냐 보다, 아름다움을 줄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충분한 것이다”라는 선명한 빛이 뇌리로 꽂히는 확신을 갖게 된다.

그는 구체적인 사실만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을 거부하고 점 선 면과 색으로만 이루어진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게 된다. 작곡가 비발디가 마법사처럼 바이올린으로 봄의 정령을 불러내고, 여름의 소낙비로 샤워를 하고, 가을의 낙엽을 밟고, 눈내리는 겨울 들판을 그림으로 그려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운명을 대하는 인간의 고뇌와 반응을 음악으로 표현하는 베토벤이 부러웠다. 림스키코르사코프가 음악으로 왕벌이 비행하는 환영을 만들어 내는 게 신기했다. 음악이 현실의 소리를 재현하지 않아도 듣는 사람의 영혼을 울린다는 점에 착안해 미술도 현실의 모습을 재현하지 않아도 색채와 점 선 면의 구도만으로도 보는 사람의 영혼에 호소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칸딘스키와 몬드리안의 추상주의 미술은 이렇게 소리에서 시작되었다.


몬드리안의 차가운 추상
바실리 칸딘스키의 Yellow-Red-Blue,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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