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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르는강물처럼 Mar 22. 2023

스페인 론다 & 어네스트 헤밍웨이

마리아 : 키스할 때 코는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요?

푸른색은 유별하다. 대자연의 기본색이기 때문이다.

바다가 푸르고 나무가 푸르고 하늘이 푸르다. 지구는 푸른 초록별이고 그린피스 환경단체는 초록사수대이다.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에는 유난히 푸른 하늘아래 고원도시 론다가 있다. 해발 739미터의 바위절벽 위에 요새처럼 버티고 있는 론다는 지각변동으로 땅에서 솟았다기보다는 그 무게 때문에 하늘에서 내려앉은듯하늘아래 첫 동네 같다. 이 세상의 도시가 아니라 하늘로 다시 올라가고 싶어하는 도시같다. 그래서인지 론다 상공의 하늘은 비장감이 들 정도로 푸르다. 하늘을 배경삼아 우뚝한 갈색의 바위절벽이 푸른 하늘과 대조되어 푸른 하늘을 더욱 푸르게 만들어 놓는다. 세비야대성당, 스페인광장 등으로 인공미가 철철넘치는 세비야 다음으로 바로 찾아온 곳이 론다이어서 론다가 대자연과 어우러지는 조화미가 더욱 돋보인다. 그래 오길 잘했어, 론다!

바위사이의 협곡을 잇는 누에보 다리 -- 바위 산위에 고원도시 론다가 있다

스페인 영토에 존속했던 이슬람제국 수도였으며 오페라 <세빌리야의 이발사>의 무대인 세비아에서 론다까지는 자동차로 2시간 반 거리. 알함브라궁전이 있는 그라나다에서도 2시간 반 거리이다. 세비야와 그라나다와 론다를 잇는 세 꼭지점 중 남쪽 지브롤터해협쪽 꼭지점에 론다가 위치해 있다. <Happy 700>으로 알려진 대관령 서쪽 고원도시 강원도 평창과 비슷한 해발 739미터의 고도에 론다가 있다. 동고서저의 한반도 지형에서 대관령서쪽으로 완만한 경사를 타고 미끄러지듯이 위치한 평창과 달리 론다는 지브롤터해협 바다 가까운 곳에 위치해 주변의 비교적 낮은 평원 위에 우뚝 솟은 암석 고원이어서 같은 700미터라도 느낌이 다르다. 키큰 사람들 사이의 키큰 사람과 키 작은 사람들 사이의 키 큰 사람의 키가 달라 보이듯이 론다는 주변 지형에 비해 우뚝하다. 


아주 오래전 이땅에 살았던 켈트족 선조들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우리나라의 설악산 울산바위의 전설같은 그런 전설을 지어냈을 법도 한데 알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튼튼하고 입체감있는 암석 도시를 만들다가 그 무게가 너무 무거워 아차하는 순간 하늘을 뚫고 지상으로 떨어트렸다는 전설이라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노벨상 수상 소설가 헤밍웨이는 론다를 가리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로맨틱한 시간을 보내기에 딱 좋은 마을"이라고 했다는데 공감이 저절로 되고도 남는다.


음식 맛이 좋기로 소문난 맛집 식당에 유명인사가 방문하여 식사를 하고 가면 맛집에서 장사진으로 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려야하는 'the맛집'으로 거듭나듯이, 노벨상 수상 소설가 헤밍웨이가 한때 이곳에 살면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For Whom the Bell Tolls>의 영감을 얻고 집필하였다하여 더욱 유명해진 곳이 론다이다. 오늘도 헤밍웨이의 흔적을 찾아 론다로 오는 관광객이 많다고 한다. 그중 나도 하나이다. 

집필중인 어네스트 헤밍웨이

사냥, 낚시, 전쟁에 빠져 역마살이 낀 듯 온 세상을 헤메고 다닌 마초남 헤밍웨이는 스페인내전에서의 경험으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1차대전에서의 운전병으로의 참전 경험을 바탕으로 <무기여 잘있거라 Farewell to Arms>를, 아프리카에서의 사냥경험으로 <킬리만자로의 눈 the Snow of Kilimanjaro>을 소설로 썼다. 쿠바 아바나에서 거주하면서 바다낚시를 즐겨하던 그는 <노인과 바다 the Old Man and the Sea>를 발표해서 결국 노벨상을 수상했다.  자신의 마초남 이미지와 걸맞게 되도록이면 형용사를 쓰지 않는 건조하고 속도감 있는 문체에 거친 대화를 그대로 구사하는 하드보일드 스타일의 필법으로 탄생된 헤밍웨이의 소설들은 '경험이 부재한 문학은 진정한 허구다' 라는 말을 대변하는듯 실제로 그의 삶을 그려내고 있어서 더욱 생생하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조종(弔鐘)은 소설의 주인공인 미국청년 로버트 조단의 죽음을 알리는 종이지만 사실은 한 개인의 죽음이 아니라 전체 인류중에 하나가 사망한 것임을 알리는 종이다. 그래서 론다는 판도라 상자안에 든 '민족주의, 전체주의, 파시즘, 제국주의, 자본주의, 공산주의, 아나키즘, 로만카톨릭, 쿠데타, 식민지의 고통'이 세상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한 몸으로 막으려 든 로버트 조단의 '살신성인'의 발상지인 것이다. 이런 느낌을 주는 론다! 그래 오길 아주 잘했어.


조용필 가수의 노래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헤밍웨이의 <킬리만자로의 눈>의 도입부 ' ~ 서쪽정상부근에는 말라 얼어붙은 표범의 시체 한구가 있다. 표범이 그 높은 곳에서 무엇을 찾고 있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를 모티브로 하여 양인자 작사 김희갑 작곡의 노래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노래 중 나레이션)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를 본 일이 있는가 
짐승의 썩은 고기만을 찾아다니는 
산기슭의 하이에나 
나는 하이에나가 아니라 표범이고 싶다 
산정 높이 올라가 굶어서 얼어죽는 
눈 덮인 킬리만자로의 그 표범이고 싶다

론다와는 상관없는 이야기 같지만 아니다. 헤밍웨이 자신이 표범이었다. 세렝게티의 하이에나와는 다른 족속임을 확인하고자 킬리만자로 정상인 것 같은 안달루시아 고원 론다에 와서 썩은 고기를 먹는 하이에나가 아니라 굶고 얼어죽더라도 표범같은 소설 속 주인공 로버트 조단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스페인 내전이 일어난 다음 해인 1937년 5월, 마드리드와 세고비아 사이 과다라마 산맥의 어느 계곡. 미국인 로버트 조던은 공화파 사령부로부터 세고비아 공격의 사전 단계로 철교를 폭파하라는 명령을 받고 이곳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공화파 게릴라들과 산속에서 함께 생활하는 아름다운 마리아를 만나게 된다. 조단은 사흘동안 임무와 사랑간, 냉정과 열정사이를 바삐 오고갔다. 고교시절 KBS 명화극장에서 보았던 장면이 떠오른다. "이 뾰족한 코를 키스할 때 어떻게 해야하나요?"라는 배우 잉그리드버그만의 말에 게리쿠퍼는 키스로 대답을 한다. 짧은 3일간의 사랑이었지만 사랑은 혁명의 불길보다도 뜨거웠다. 


조단은 공화군 사령부의 명령대로 교량을 폭파한후 추격해오는 반군 파시스트 추격대를 피해 사랑하는 마리아가 안전한 곳으로 달아날 때까지 기관총 불을 뿜으며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다. 기관총 소리는 바로 종소리가 누구를 위한 종소리인지에 대한 대답이었다. 조단이 최후를 맞이하는 장면은 작가가 누에보 다리에서 얻은 영감에서 탄생한 것이리라. 


누에보 다리


론다는 크게 두 구역으로 나누어진다. 이슬람 시절 무어인이 살던 구시가지 라씨우닷(la ciudad)과 신시가지 엘 메르까디요(el mercadillo)가 그것이다. 150m 깊이의 타호협곡이 두 구역 사이에 있다. 두 구역을 잇는 다리로 이슬람 시절인 11~16세기에 만들어진 뿌엔떼 비에호(puente viejo)가 있지만, 협곡을 사이에 두고 육성으로 대화를 나눌 수도 있는 거리를 한참을 돌아가야 해서 아주 불편했다.


당시 국왕이었던 필립 5세의 명으로 새로운 다리를 위한 공사가 야심 차게 시작됐다. 직경 35m의 아치형 다리를 계획했지만 공사 도중 다리가 내려앉아버렸다. 당시 스페인의 기술로는 무리였나보다. 몇 년이 지나 1751년에 다시 공사가 시작됐다. 이번에는 안달루시아의 건축가인 호세 마르틴(Jose martin)의 설계로 협곡 아래부터 단단히 돌을 쌓아올렸다. 시간이 오래 걸린만큼 1차 공사처럼 무너질 염려는 없었다. 무려 42년간의 공사끝에 1793년에 신시가지와 구시가지는 하나로 연결되었다. 길이 120m, 높이 98m의 다리는 거대한 댐처럼 견고해 보였다. 누에보 다리(Puente Nuevo)란 '새 다리(新橋)'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그 규모나 공사기간이나 미적 수준으로 볼 때 그 이름이 다소 엉뚱하다. 예쁘라고 '김이쁜'이라 부르고 점이 있다고 '이점돌'이라고 지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어쨌거나 누에보 다리는 헤밍웨이와 그의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와 더불어 관광객들이 론다를 찾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론다 투우장

누에보 다리 건너 신시가지에는 론다 투우장이 있다. 1785년에 개장한 스페인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경기장이다. 투우박물관도 있다. 투우장 입구와 주변에는 황소 동상과 유명한 투우사 페드로 로메로의 이름이 길바닥에 돌로 새겨져 있다. 


스페인 북부 산탄데르 서쪽 30㎞ 지점에는 알타미라 동굴이 있다. 동굴 천장에는 구석기 시대의 것이라 추정되는 들소의 그림이 그려져있다. 우리 조상님들의 토템이 곰이듯이 스페인 구석기인들의 토템이 들소였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식량을 얻기 위해 들소 사냥을 했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운다. 

사냥하기 쉬운 순록이나 더 작은 동물들도 있었을텐데 왜 사나운 들소를 먹이로 삼았을까? 

그 대답은 스페인 사람들이 즐기는 투우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작은 먹잇감보다는 큰 동물을 사냥해야 많은 사람들이 장기간 먹을 수 있는 식량이 되는 것이다. 구석기 시대의 들소 사냥의 전통이 오늘날의 투우로 남아 있는 것은 아닐까. 좁은 크기의 숨골을 찾아 거기에다가 정확히 칼을 꽂아 넣을 수 있어야 인기 투우사라는데 위험천만이다. 날카로운 황소의 뿔에 받히면 중상은 천만다행이다. 그럼에도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에 나오는 '투우사의 합창'을 들으면 누구나 벌렁대는 심장을 느끼는 것은 인간도 무의식속에 잠재한 살해본능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닌지. 섬뜩하다. 

영화 <모비딕> - 에이허브선장(배우 그레고리펙)


허먼 멜빌의 자연주의 소설 <모비딕>에는 자신의 한쪽 다리를 앗아간 흰고래와 싸우는 에이허브 선장이 나온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사나운 황소의 뿔에 받히면 죽을 수도 있는데 투우의 모험심을 가진 스페인 사람들은 대단히 자연주의적이다. 세계 최초로 대서양을 건너 인도로 가려는 시도로 나타났다. 아프리카 아메리카 아시아에 걸친 식민지 개척으로 영국보다 먼저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스페인 제국이었다. 이 열정 때문에 왕조시대가 저물어가는 즈음에 온갖 주의(主義)사상이 난무하여 대혼란의 시기를 겪은 것은 아닐까.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우리가 겪었던 격동기를 보는 것 같다. 열정도 닮았고, 반도국가라는 점도 닮았고, 투우 비슷한 소싸움이 우리에게 있는 것도 닮았다. 

 

버스를 타고 론다를 떠나면서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보다 면적이 넓고 비옥한 땅을 갖고 살면서 무엇 때문에 저 넓고 아름다운 땅들을 놔두고 이렇게 험하고 깊은 계곡과 낭떠러지 위에 도시를 건설하고 살게 되었는지 또 왜 양쪽 절벽을 잇는 다리를 놓았는지 참 의문스럽다.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온 무어인들의 침입과 같은 침입을 막기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쨋든 이곳에 살아야 할 어떤 사연을 가지고 조상님 누군가가 이곳에 터를 내렸을 것이고, 일단 살다보면 죽을 일 아니고서는 이삿짐을 싸기란 어려운 일일 것이다. 산하에 정들고 가꿔논 농토를 포기하기도 어렵고 기후에 맞춰 생활방식이 정해져 익숙해지면 그게 가장 편한 게 된다. 사람은 변화를 두려워한다. 미지의 세계를 만난다는 건 무서운 일이다. 그래서 과거는 이미 알고 있는 세계이자 이미 정해진 결과이어서 돌아보기 쉽지만 아직 오지않은 시간 미래는 두려운 것이다. 


<여우누이>라는 전래동화가 생각난다. 사람으로 둔갑한 여우인 누이를 둔 오빠는 자신을 헤치려 쫓아오는 여우를 위기에 처할 때마다 호리병 세개를 하나씩 던져 물리친다. 여행이란 것도 낯선 여러 세상의 과거를 되짚어서 내 앞에 다가올 미래에 대비할 호리병을 마련하고자하는 처세술이 아니겠는가. 

누에보 다리를 걸어 구세계에서 신세계로 나아가듯 또 하나의 호리병을 찾으러 그라나다 알함브라궁전으로 향한다. 번민은 접어두고 이동 중 잠 좀 자 두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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