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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르는강물처럼 Mar 28. 2023

알람브라 - ♬황성옛터

"여인이여 ! 그라나다의 눈 먼 장님만큼 불쌍한 사람은 다시 없다오."


(1부)

      황성옛터(1929년)  
                        왕평 작사 / 전수린 작곡

황성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 가엾다 이내몸은 그 무엇 찾으려고     
끝없는 꿈의 거리를 헤메어 왔노라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폐허에 설운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이 잠 못 이뤄  
구슬픈 벌레 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무너진 왕조의 성터는 슬프다.

낙조 속에 웅크린 궁터는 더욱 구슬프다.

상처 입은 채 단말마의 신음소리와 함께 숨을 그르렁거리는 맹수의 마지막을 보는 듯하다.

<황성옛터>라는 노래가 구슬픈 이유는 여염의 집터가 아니라 무소불위의 권력과 찬란한 영화의 궁터였기 때문이고 황성 안에서 호령하던 이의 좌절과 패배와 비참한 죽음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리라. 여우의 주검을 대할 때와 호랑이의 주검을 대할 때  감회가 다르듯이. 

                           

우리 역사 속의 '황성'은 말그대로 옛터 뿐이다. 옛터를 정확히 몰라 '추정'이란 단어를 써야하는 경우도 있다. 전 시대의 것을 철저히 말살시켜 버린 탓인가. 아니면 외침이 잦았던 우리 땅에서 외적들이 황성마저 훼손해버린 탓인가. 


중세 당시 스페인의 역사와 문화는 우리의 것과 크게 달랐다. 이민족이 자기네 종교를 가지고 이베리아 반도에 들어와 800년을 살다가 자기네 식으로 지은 건축물을 남긴채 물러갔고 스페인은 남은 건축물을 훼손시키지 않고 자기네 식대로 리모델링하여 그대로 사용하고 보존하고 있다. 알람브라도 일부 리모델링되었지만 거의 그대로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니 참 다행스럽다. 


스페인 고원 도시 론다를 떠나 이제 그라나다로 간다. 

그라나다는 이베리아반도 남쪽 안달루시아 지방에 있다. 그라나다에는 알람브라가 있다. 몹시 설레인다. 바르셀로나에서 사그라다파밀리아(가우디 성당)를 보기 전의 설레임과 알람브라를 만나기 전의 설레임은 결이 사뭇 다르다. 전자가 사랑하는 연인을 만나러 갈 때의 설레임이라면 후자는 30년 동안 헤어져있던 늙은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것과 같은 설레임이랄까. 사실 설레임과는 거리가 있다. 혈육에 대한 그리움이 변한 아픔과 돌보지 못한 불효의 미안함이며, '난 괜찮다 객지에서 고생많았지'하고 품에 안아 줄 어머니의 바보스러운 사랑이 비수처럼 내 가슴을 찔러올까봐 겁이 나는 그런 애통함이다.


아는 것 만큼 보인다는 말은 역시 이번에도 어김이 없다.

 

1492년은 스페인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 여왕에게는 아주 특별한 해였다.

콜럼버스가 이사벨 여왕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산타마리아 호를 기함으로하여 세 척의 범선에 90명의 선원을 태우고 스페인의 팔로스 항을 출발했다. 이후 신대륙이 가져다 줄 엄청난 부로 스페인은 세계 최초로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의 지위를 얻게 될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800년 동안 이슬람 지배 아래 있다가 이슬람 세력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낸 게 1492년 1월이었다. 8세기 초인 711년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이베리아 반도에 들어온 북아프리카의 무슬림들이  이베리아 반도 대부분을 단기간에 점령하자 기독교 왕국은 산악지대로 몰려나 숨 죽이고 절치부심하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슬람 왕국이 내부 분열로 혼란스러운 틈을 타, 스페인 기독교 국가들은  소위 재정복 운동(레콩퀴스타 Reconquista)으로 영토회복 전쟁을 시작했다. 드디어 1492년 이베리아 반도의 남단 그라나다를 점령함으로써 이슬람 세력을 반도에서 완전히 축출해냈다. 그 중심에 이사벨 여왕과 그녀의 남편이자 아라곤의 왕이었던 페르난도 5세가 있었다.


한편 레콩퀴스타로 남쪽으로 계속 밀려나던 이슬람 세력은 1232년 스페인 남부에 그라나다 왕국을 세웠다. 왕국의 주인은 나스르 왕조였다. 그라나다 왕국은 사방에서 압박하고 있는 키스티야-아라곤 연합왕국과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엄청난 조공을 바쳐가며 필사적인 외교정책을 펼쳤다. 한 때의 호랑이가 이제는 스라소니가 되어 겨우 목숨을 부지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굴욕적으로 얻은 평화였지만 그라나다 왕국은 학문과 문화, 예술과 경제가 찬란한 개화기를 맞이하였다. 알람브라 궁전은 그 와중에 개화기의 꽃이 맺어준 탐스런 과실이었다.


평화는 크리스털 같다.

아름답기는 하지만 얻기에 어렵고, 얻은 다음에는 깨지지 않도록 소중히 지켜야하는 물건이다. 작은 부딪힘에도 금이 가기 시작하고 일단 금이가기 시작하면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다. 파국은 외부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라나다 왕국 내부의 분열에서 시작되었다. 1417년 유수프 3세의 사망과 함께 시작된 권력다툼은 왕국이 풀잎에 맺힌 아침이슬처럼 사라질 때까지 멈추지를 않았다. 불행하게도 이사벨이 카스티야 왕국의 왕이 된 것도 그라나다로서는 큰 불행이었다. 걸출한 여왕은 오랜 세월 이어진 내전을 슬기롭게 끝내고, 기독교 왕국인 신의 땅에 이교도 왕국을 허락했던 불경의 죄를 씻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항복하는 보압딜 왕


어느 역사든 한 국가의 마지막 순간에는 못난 왕이 있기 마련이다. 

그라나다 왕국의 마지막 왕 보압딜(무하마드12세)은 선왕이었던 아버지를 반란으로 몰아내고 왕좌에 앉았으나 왕관의 무게를 이겨내기에는 부족함이 많았다. 왕이 되고 난 뒤에도 삼촌과 권력다툼에 골몰하다가 결국 이사벨 여왕의 군대에게 조금씩 영토를 잠식당해가며 겨우 버티다가 1492년 1월 결국 성문을 열어주고 말았다. 800년전 선조들이 거센 밀물처럼 몰려 왔던 지중해의 그 물길을 따라 이제 허망한 썰물을 타고 북아프리카로 다시 밀려나게 되었다. 썰물은 밀물이 가져온 것을 몰아갔다.



"그라나다를 잃는 것은 아깝지 않으나 알함브라 궁전을 다시 못본다니 안타까울 뿐이다."

그라나다를 이사벨에게 빼앗기고 눈 덮인 시에라네바다 산맥을 넘는 도중 알함브라 궁전을 바라보면서 나스르 왕조의 마지막 왕 보압딜이 울면서 한 말이라고 한다. 왕국은 무너지고 패주인은 떠나갔어도 알함브라는 온전히 남아있기를 바라는 누군가가 지어낸 말일지도 모른다. 


일설에 의하면 카스티야-아라곤 스페인 연합왕국에 항복하면서 보압딜은 애지중지하던 알함브라 궁전의 파괴를 막기 위해 필사 항전을 포기하고 궁을 고스란히 넘겨주었다고한다. 파괴로부터 궁을 지킨 보압딜 뿐 아니라 적의 흔적을 지우겠다고 궁을 파괴하는 일 없이 후손에게 물려준 정복자들도 고마운 조상들이다. 어느 시대이건 '현시대인(現時代人)'들은 후손에게서 미래를 빌려서 살아간다는 말의 의미가 더욱 심장해진다. 덕분에 지구 반대쪽에서 온 이국의 방문객인 나도 지금 알람브라를 찾아오지 않았는가. 그러나, 알람브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일국의 왕으로서 보압딜이 내린 결정이 최선의 방책이었는지에 대한 생각은 우리들 각자의 몫이다. 


보압딜 왕의 고별     - 알프레도 드오당크 作


2부 <알람브라 - 그 아름다운파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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