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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르는강물처럼 Mar 29. 2023

알람브라 2 - 그 아름다운 파멸

Isabell  - "나를 잃고 싶지 않다면 그라나다를 빼앗기지 마라"

(2부)

1부 <알람브라 - ♬황성옛터>에서 계속됩니다

♬황성옛터

니콜라스 전망대에서 알람브라 궁전을 바라보면 눈덮인 시에라네바다산맥이 멀리에서 배경이 되어준다


이제 알람브라 앞에 서 있다.

가이드는 해질녁 알바이신 언덕의 聖.니콜라스 광장으로 인도했다. 알바이신 언덕이 알람브라가 있는 언덕과 높이가 엇비슷하여 알람브라의 파노라마를 눈에 담기에 최적의 장소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알바이신 언덕에 서서 낙조의 시간에 알람브라를 보라는 건 무엇을 뜻하는가? 스러진 왕국의 비애에다가 여행객의 정서를 더 얹어보라는 것이다. 어디선가 타레가의 기타 연주곡 <알람브라의 추억>이라도 흐르면 눈물이 주르르 흐를 것만 같다.


멸망한 왕조는 아련하다. 멸망한 왕조의 왕궁은 구슬프다.

그러나 알람브라에게는 그냥 슬프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적당한 표현이 금방 떠오르지 않는다. 망국의 한이 서린 왕조 치고 슬프지 않은 왕조 없지만 알함브라에게 가장 어울릴만한 표현을 찾는다면 '아름다운 파멸'이라는 형용모순적 표현이 가장 어울릴듯하다. 나라는 멸망했으나 아름다움을 남겼다는 말인데, 멸망은 원인과 과정의 스토리이고 그 결과는 아름다움이다.


가이드의 시의적절한 안내 덕분에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됐다.

빛의 조화로 알람브라는 변신을 거듭했다. 늦은 오후의 농익은 광휘에 드러난 알람브라의 나신(裸身)에 멍해졌다가,  1월 낙조의 건조한 붓질로 알람브라의 붉음에 붉음이 더해짐에 경탄하고, 경탄이 차츰 무디어갈때쯤 검은 실루엣으로 자신을 감추려던 알람브라에 숙연하다가 갑작스런 전기조명으로 화려한 변신을 한 알람브라에 경악했다. 문득 시인 이카자(Francisco de Icaza, 멕시코 출신의 스페인 주재 외교관,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의 싯귀가 떠올랐다. “여인이여! 그에게 적선하시오. 그라나다에 살면서 눈이 먼 것보다 인생에서 더한 시련은 없을 것이오.”    

 

알바이신 언덕에 서면 시에라네바다산맥을 배경으로 서있는 알람브라를 볼 수 있다


멀고 먼 극동의 나라에서 온 방문객인 나의 오감각과 뇌가 전기충격을 받은 듯했다. 알람브라는 다른 여행지에서처럼 어설픈 감성만 늘어놓고 쉽게 떠날 곳은 절대 아니다. 그라나다의 마지막 왕 보압딜은 알람브라를 내주고 시에라네바다 설산을 넘으며 수없이 뒤를 돌아보았다. 못난 왕이었지만 알람브라를 찾는 이들은 누구나 못난 왕의 뒤돌아보는 애절함에 공감하지 않고서는 알람브라를 떠나서는 안된다. 눈을 통해 들어온 광경들을 속속 받아들여 알람브라의 '아름다운 파멸'이란 게 구체적으로 뭔지를 아보는 게 알람브라가 있게 만든 모든 이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그게 뭘까?


첫째.  역사적 슬픔에서 오는 페이소스이다.

우리 역사 속의 고구려의 수도가 만주 졸본성에서 국내성을 거쳐 한반도 내의 평양성으로 옮겨진 것은 스페인의 이슬람 왕국이 세력을 잃어가면서 수도가 점점 남하한 것과 유사하고, 고구려의 실권자였던 대막리지 연개소문의 아들 삼형제의 권력다툼으로 국력이 쇠잔해진 것은 그라나다 왕국 말기의 권력다툼과 흡사하다. 사자가 자신보다 더 크고 힘센 들소를 사냥하는 방법은 들소 떼 사이로 돌진하여 들소를 갈라서 분열시킨 후 잡아먹는 것이다. 그러나 그라나다는 권력을 두고 스스로  분열했다. 그라나다의 죽음은 자살이었다.


레콩퀴스타의 완성을 필생의 과업으로 알고 살아온 이사벨 여왕에게 반도의 남쪽에 남아 있는 그라나다 왕국은 끊어야 할 이슬람의 마지막 숨통이었다. 숨통을 끊은 여왕은 다시는 이슬람이 이땅에 발을 딛지 못하게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나를 잃고 싶지 않다면 그라나다를 빼앗기지 마라." 여왕은 자신을 그라나다에 묻을 것을 그렇게 명하고 눈을 감았다. 이사벨 여왕의 시신은 지금도 그라나다대성당에 안치되어 있다.


이사벨 여왕 - 벨라스케스 작

둘째.  미인박명적(美人薄命的) 슬픔에서 오는 애수이다.

한 왕국의 나이가 260년이라면 그다지 긴 게 아니다. 그라나다 왕국은 건국 초기부터 260년 운명의 기운을 안고 있었다. 하나님의 성지를 탈환하겠다는 카톨릭국가인 카스티야-아라곤 연합왕국의 레콩퀴스타 칼부리가 그라나다로 언제 들이닥칠지 알 수 없었다. 타고난 미인도 가꾸지 않으면 범녀일 수 밖에 없다. 불안 속에서 연합왕국에 굴욕적인 조공을 바쳐가며 목숨을 부지하는 중에도 알람브라를 설계하고 가꾸기를 멈추지 않았다.


보알딜은 그라나다를 포위한 이사벨여왕에게 정치적 생명이 다하는 순간에도 알람브라만은 살려달라고 매달렸다. 솔로몬의 재판같았다. 아이를 차지할 욕심으로 아이의 반이라도 얻기보다는 차라리 아이를 내주어 아이를 살리겠다는 친모의 사랑. 정치적으로는 못난 왕이었지만 보압딜은 알람브라에게만은 친모였다. 알람브라는 그렇게 살아남았다.


알람브라는 붉은 성이라는 뜻이다. 철 성분이 많은 흙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세월이 흐르면서 붉은 색으로 변했다고 한다.


셋째.  낮은 채도의 흙 건물이  원시 인류적 향수를 자아낸다.

번쩍이는 유리재질로 외장 마감을 한 고층건물이 즐비한 현대의 도시. 밤마다 시선을 끌고자 몸부림치는 휘황찬란한 네온사인 간판의 밀림. 그 사이로 난 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들. 기계들이 노예인 것 같으나 사실은 기계에 구속되어 사람이 기계의 노예로 살아가는 세상. 과학문명 발달의 전시장같은 곳에서 살다가 알람브라 앞에 서면 로봇들이 비로소 사람으로 돌아오게 된다. 아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장난감은 흙이며, 흙은 내가 태어난 곳이고 내가 돌아갈 곳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알람브라에게서 느끼는 흙의 질감과 흙빛이 주는 원시인류적 향수를 느끼게 된다. 알람브라는 어머니의 따스한 자궁으로 다시 돌아가는듯한 회귀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역사학자도 아니고 여행전문가도 아니면서 돌팔이 주제에 어줍잖고 어설프게 알람브라에 감히 메스를 들이대다니. 스스로 생각해보아도 실소를 짓게 되지만, 사랑하면 호기심이 많아지는 법이라는 말에 힘을 얻어 뻔뻔해지기로 한다. 알람브라를 안가본 사람은 있어도 한번만 간 사람은 없다!  맞지 않는 말이겠지만 꼭 다시 한 번 더 가보겠다고 마음 먹지 않는 사람이 없다는 말은 맞는 말일 것이다. 이국 땅에서 운명과 같은 사랑에 빠졌는데 그 연인을 남겨두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듯하다. 나만의 심정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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