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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르는강물처럼 Mar 06. 2024

<명사산의 추억>에 젖어들며

니체의 위버멘쉬

명사산 추억


                                       나태주


헛소리하지 말아

누가 뭐래도 인생은 허무한 것이다

먼지 날리는 이 모래도 한때는 바위였고

새하얀 조그만 뼈 조각 하나도 한때는

용사의 어깨였으며 미인의 얼굴이었다


​두 번 말하지 말아라

아무리 우겨도 인생은 고해 그것이다

즐거울 생각 아예 하지 말고

좋은 일 너무 많이 꿈꾸지 말아라

해 으스름 녘 모래 능선을 타고 넘어가는

어미 낙타의 서러운 울음소리를 들어보아라


​하지만 어디선가 또다시 바람이 인다

높은 가지 나무에 모래바람 소리가 간다

가슴이 따라서 두근거려진다

그렇다면 누군가 두고 온 한 사람이 보고 싶은 거다

또다시 누군가를 다시 사랑하고 싶어

마음이 안달해서 그러는 것이다


​꿈꾸라 그리워하라 깊이, 오래 사랑하라

우리가 잠들고 쉬고 잠시 즐거운 것도

다시금 고통을 당하기 위해서이고

고통의 바다 세상 속으로 돌아가기 위함이다

그리하여 또다시 새롭게 꿈꾸고 그리워하고

깊이, 오래 사랑하기 위함이다.




한반도에는 십리길에 이르는 바닷가 백사장이 두 군데라고 합니다. 하나는 강원도 원산시 용천리에 있는 갈마반도의 明沙十里 , 또 하나는 전라남도 완도군 신지면 신리에 있는 鳴沙十里입니다. 모래가 고와서 밝은 은빛으로 빛나서 밝을:명을 쓰기도 하고 고운 모래를 맨발로 밟으면 우는 소리를 낸다고 울:명 자를 쓰기도 합니다. 파도에 쓸려 수만 년 바다 쪽으로, 육지 쪽으로 오가면서 점점 입자가 고운 모래가 되었습니다.


중국에는 굵은 모래가 바람에 휩쓸려 다니느라 고운 모래가 된 사막이 있습니다. 중국의 둔황은 고비사막이 실크로드와 만나는 곳입니다. 둔황의 한가운데에바람이 모래를 몰아세우며 언덕을 이룬 밍샤산(鳴沙山)이 있습니다. 바람에 쓸려 모래와 모래의 마찰이 내는 소리는 땅이 부르는 <칸토 델라 테라(Canto Della Terra 대지의 노래)>이자 바람과 모래가 연주하는 교향곡입니다.


낙타는 '사막의 배'라 불리는 동물입니다. 거친 바다의 폭풍과 높은 파도를 헤치고 배가 항해하듯이 낙타는 사막의 모래 폭풍과 바람이 만든 높은 모래의 파도를 넘어 오아시스로, 초원으로 항해하는 동물이니 가히 사막의 배라 불릴만합니다. 바다의 배가 무심히 홀로 항구를 떠나지 않듯이 낙타도 스스로는 뜨거운 열사의 사막에 발을 들이지는 않습니다. 자신의 짐이 아닌 남의 짐을 등에 싣고 고난의 사막을 건너는 슬픈 운명의 동물입니다.


시인은 아름다운 시 <명사산의 추억>으로 슬프고도 아름다운 메시지를 던집니다. 인생은 남의 짐을 싣고 사막을 건너는 어미 낙타의 삶과 같습니다. 인생은 어미 낙타 자신의 운명을 새끼에게도 대물림해야 하는 고해의 바다입니다. 그래서 '해 으스름 녘 모래 능선을 타고 넘어가는 어미 낙타의 서러운 울음소리'는 한 맺힌 절규입니다. 그러다 문득 한줄기 모래 바람이 불면 타는 오아시스의 물을 찾아 억척스럽게 부지런히 걸어야 하고, 떠난 곳에 두고 온 새끼 낙타에게로 돌아가야 한다는 목적과 희망을 갖게 됩니다. 이와 같이  누군가 두고 온 한 사람이 보고 싶어지고 그에게로 돌아가고 싶어지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시인은 니체를 염두에 둔 것인지 아닌지를 알 수는 없지만 시의 흐름은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Also sprach Zarathustra>에 나오는 '위버멘쉬(초인, 超人, Ubermensch)'로 나아가는 세 단계의 궤적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





니체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자신의 삶의 목표를 '위버멘쉬'를 통해  제시하였습니다. 그는 사람 낙타, 사자, 어린아이의 세 단계로 분류하였습니다. 낙타 단계의 사람은 남의 짐을 등에 지고서 사막을 무작정 걸어가야 하는 운명의 동물, 낙타처럼 자신이 처한 상황에 아무 말 없이 그저 순응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사자는 낙타보다는 위버멘쉬에 가까우나 종교와 도덕이 하라는 대로 살아가기를 거부하며 주체성을 찾으려 하지만, 저항심만 커진 고통과 허무의 인간입니다. 자신의 삶의 지배자가 되어 진정한 주인공은 되지 못합니다. 


어린아이 단계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만사태평의 경지를 넘어 '천하태평'의 경지에 이르러 '호모 루덴스(Homo Ludens, 놀이하는 인간)'로서의 인간의 경지에 이른 사람입니다. 자신이 처한 환경 다시 말하면 운명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달래고 위로하기 위한 놀이가 아니라 운명 자체가 놀이라고 여길 수 있는 경지가 어린아이의 단계일 것입니다, 한 운명이 주는 슬픔을 잊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는데 몰두하는 인간이 아니라 어린아이처럼 놀이를 통해 질리지 않고 긍정하여 놀이와 운명을 일치시킬 수 있는 자신만의 정체성을 새롭게 이루어가는 어린아이의 단계가 니체가 말하는 운명초월자, 위버멘쉬가 됩니다.


문학작품 속에서 가장 잘 나타난 위버멘쉬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의 주인공 조르바일 것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라고 조르바는 외칩니다. 자유인과 자유는 크게 다릅니다. 플라톤의 '이데아'를 굳이 들이대지 않아도, 자유인에게서는 자유의 純度(순도)가 많이 떨어진다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자유를 추구하는 정도로는 완전한 자유를 이룰 수 없기때문입니다. 조르바는 자유인이 아닙니다. 그는 자유 그 자체입니다. 조르바는 심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인간에게 존재하는 모든 욕망과 고통을 정복한 사람입니다.


카잔차키스 스스로 자신에게 미친 호메로스와 니체의 영향력은 아주 크다고 밝혔습니다. 니체의 위버멘쉬를 염두에 두고 조르바라는 주인공을 지어낸 게 분명해보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라는 조르바의 말은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위버멘쉬다.'라고 말함과 같습니다.

 



어린아이란 어떤 존재일까요? 성서 중 <누가복음>의 기록자는 다음과 같이 예수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 누가복음 18:17

예수께서는 어린아이의 마음을 가지고 믿어야 하나님의 나라, 천국으로 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하고 투명한 마음을 상실한 사람들은 가슴이 뜨거운 게 아니라 천국에 대한 소망만 뜨거우니 결단코 천국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훈계하고 계십니다.


수께서는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먼 것이 '머리와 가슴 간의 거리'이니 이를 경계하라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마리에는 그의 저서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에서  미니멀라이프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나에게 설렘을 주지 않는 것에는 망설임을 갖지 말 것을 종용하고 있습니다. 비단 물건뿐 아니라 우리 마음의  창고에는 설렘을 주지 못하는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충동과 욕망과 욕심으로 점점 채워지면서 머리와 가슴 간의 거리도 점점 멀어져 갑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지니지 않은 자는 결단코 천국에 이르지 못할 것이라는 예수의 말씀이 큰 울림을 남깁니다.


18세기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드는 <Rainbow 무지개)>라는 시에서 '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어린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고 했습니다. 아이는 순수하고 가슴속에 숨김이 없습니다. 새로운 세계에 호기심이 있고 주변 사물들에 감동할 줄 압니다. 버지 보다 돈은 없지만 순수한 마음과 설렘으로는 아버지 보다 훨씬 부자입니다. 천국에 이르기를 원하는 어른들이 가져야 하는 게 어린아이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는 어른들에게 본보기가 되는 '어른들의 아버지'입니다.


지만 니체는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천하태평'의 경지에 이르러 걱정, 욕심, 질투, 경쟁심, 증오심을 갖지 않아야 비로소 간의 경지를 초월한 초인이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도 사후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말입니다. 당히 어려운 과제를 스스로의 수련을 통해 이루어낼 것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은 죽었다는 근원적 상실감에 빠져서  이 아니라 자신의 주체성과 의지로 현실을 극복할 것을 주장하는 무주의적 현실주의자가 바로 니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공자(孔子)께서는 자신의 나이代에 따라 이루어야 할 삶의 경지를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습니다. '사십의 나이에 불혹, 오십에 지천명, 육십에 이순하였고, 칠십에 이르러서는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라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 어쩌면 니체는 공자가 칠십 나이에 이루었다는 '종심소욕 불유구'의 경지를 어린아이의 단계에 이르러 긍정심과 평정심을 갖춘 위버멘쉬와 오버랩시키고 싶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공자의 칠십 대 노인은 마음이 가는 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어야 마음이 편해지지만 니체의 어린아이는 마음 가는 대로 해야 마음이 편하다는  차이는 있으나, 니체는 차이보다는 마음의 긍정심과 평정심에 주목을 하고 있습니다.


니체는 그의 또 다른 저서 <즐거운 지식>에서는 '아모르파티 Amor Fati / 運命愛 / Love of Fate'의 개념을 도입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운명을 거부하며 저항하려는 게 아니라 자신의 처지에 순응하고 극복해냄으로써 Amor Fati를 이루려니다. 스스로 아모르파티의 경지에 이른 자는 신이 내린 가혹한 운명에도  불행하지 않으므로 니체는 '신은 죽었다', 심지어는 '우리가 신을 죽였다'라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니체에게는 고통을 받는 자에게나 고통을 주려는 자에게나 운명을 극복해냄으로써 느껴지지 않는 고통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니체는 독일 작센 지방의 개신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의 희망에 따라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대학을 다닌 적도 있었습니다. '집안의 반역자'였던 니체이지만 정반대의 길로 걸어가야 할 자신의 운명도 그 자신에게만은 '아모르파티'였습니다. 아이러니컬한 일입니다.





다시 나태주 선생님의 <명사산의 추억>으로 돌아가봅니다. 팔순을 바라보는 老시인은 아들로, 남편으로, 아버지로, 교육자로, 시인으로 '해 으스름에 모래능선을 넘어가며 서러운 울음을 토하는 어미낙타'로 살아오셨지만, 높은 가지 나무에 이는 모래바람에 사명감과 희망과 열정을 품게 되는 어린아이와 같으십니다. 그래서 선생님께서는 팔순에도 동안의 얼굴을 가지실 수 있으신가 봅니다.



선생님, 건강하십시오. 만무강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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