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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르는강물처럼 Aug 28. 2024

일상성이 적어질수록  인생의 충실감은 커진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은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 보이지도 않는 바람이 그물에 걸렸는지 빠져나갔는지 어떻게 아나요. 그물이 흔들리고 바람에 풀잎이 눕는 보면 알지요.


시간이 존재한다는 건 어떻게 아나요? 눈에 보이지도 않고 바람처럼 지나가는 게 시간이라는데 말입니다. 추억으로 알지요. 추억이 남아 있으면 시간이 흘러 지금에 이르렀다는 알고 지금 역시 과거가 되면 지금도 추억이 되잖아요. 역사는 시간이라는 지층 속에 숨겨진 화석이듯이요. 바람에 눕는 풀잎의 흔들림으로 바람을 알듯이 추억과 노화와 장구한 세월에 걸친 진화로 시간의 존재를 알지요.


그럼 우리가 추억이라고 말할 수 있는 기억거리가 많으면 시간이 길게 느껴지겠네요? 그렇지 않을까요. 하루하루가 싱거우면 결국 내 삶도 싱겁고 시간을 짭짤하게 보내면 소금처럼 변하지 않는 짭짤한 추억들이 내 삶을 길게 만들어줄 거라 믿어요.




정말 그럴까요?

천년을 산다면 실컷 살았다, 지겹다, 이제 그만 살자. 이렇게 될까요. 아닐 겁니다. 산 세월의 길이로 '오래 살고 짧게 살고'를 판단하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아무리 맛있는 요리를 대해도 맛있다는 기준은 내 입이어야지 요리사나 나와 같이 식사하는 사람의 입맛은 아닙니다. 내 인생이 짭짤했는지 무미건조했는지는 나에게 달린 것입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지만, 인생이 예술 작품 같은 아름다운 추억들로 채워지면 미술관 전시회 같은 풍성하고 길고 긴 인생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과학적 근거는 있는 걸까요?

살다 보면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이 빨리 지나갑니다. 어렸을 때는 시간이 그렇게 느린데 왜 나이를 먹으면 이렇게 시간이 금방 지나갈까요.

몇 년 전에 밝혀졌는데요. 어렸을 때에 뇌의 신경세포 정보 전달 속도는 나이 먹었을 때보다 훨씬 더 빠릅니다. 그러다 보니까 우리가 어렸을 때 하고 나이 먹었을 때 하고 같은 현실에 살지만 어렸을 때는 신경 세포의 정보 전달 속도가 빠르다 보니까 세상을 더 자주 볼 수 있다는 거예요.

세상을 자주 본다는 건 1초나 1분 단위로 더 많은 프레임을 찍을 수 있다는 거죠. 축구 경기에서 1초에 30번 프레임을 찍으면 그냥 축구 경기지만 1초에 3천 번이면 슬로모션이 되죠. 그런 식으로 어렸을 땐 세상을 슬로모션으로 보는 겁니다. 어렸을 때는 세상을 빨리 샘플링하니까 슬로모션인데, 나이 들면 듬성듬성 샘플링하니까 그냥 1월이네, 6월이네, 어~ 12월이네 이렇게 한 해가 그냥 쑥 지나가 버려요.

                                          2015년 3월 17일 - 이화여대 대강당 - 카이스트 김대식 교수


일상성이 적어질수록 인생의 충실감은 더 커지게 됩니다. 

눈으로 찍어 뇌에 저장된 사진이 많을수록 시간이 길어집니다. 더 정확한 표현은 시간이 길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50년 같은 100세 인생이 있고, 100년 같은 50세 인생도 있을 수 있는 겁니다.


그러나 무조건 모든 것이 뇌에 다 저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눈은 망막에 맺히는 모든 것을 보지만 우리 뇌는 변화가 있는 것만 저장합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 눈이 어떤 사람을 보게 될 때 수정체를 통해서 들어온 빛이 망막에 상으로 맺히게 됩니다. 그런데 수정체와 망막 사이에 있는 거미줄 같은 혈관도 망막에 함께 맺힙니다. 그러나 사람은 움직이는 존재이며 즉 변화의 값이 존재하는 동물이기 때문에 뇌는 사람의 움직임을 감지하여  망막에 상이 맺히지만, 혈관은 움직임이 없기 때문에 상이 맺혀도 못 본 것으로 처리해 버립니다. 뇌는 변화가 없는 것에는 주목을 하지 않습니다. 일상의 반복되는 일들이 그러합니다. 만일 망막에 혈관의 그림자들이 맺힌다면 우리는 미칠 지경이 될 것입니다. 즉 변화가 없는 정보까지 우리 뇌가 다 기억해야 한다면 우리 뇌는 그 양을 다 감당해내지를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매일 같은 직장에서 같은 사람들과 모여서 같은 일 또는 비슷한 일을 하다 보면 뇌에 저장될 정보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즉 기억에 남지 않고 추억으로 존재하지 못합니다. 직장에서 만난 매력적인 이성을 만났을 때의 설렘, 승진, 퇴사와 같은 특별한 일은 기억에 남겠지요. 그럴 때마다 '사진'으로 인생 앨범에 보관되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노라면 '일각이 여삼추(一刻如三秋)'라고 합니다. 설렘이 우리에게 짧은 시간을 세 번의 가을을 지나는 듯 길게 느껴지게 합니다. 여행이란 내가 일상을 벗어나 非일상의 장소로 이동하는 일입니다. 그곳에서 일상적으로 먹던 음식이 아니라 그 지방의 토속음식을 맛보게 됩니다. 낯선 사람들을 만나면 자신과 다르게 생긴 모습과 다른 생활모습을 눈여겨보게 됩니다. 그래서 사진을 찍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여행을 기다리는 마음이라면 '일각이 여십추(一刻如十秋)'가 되고도 남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33년을 살았지만 마지막에 "다 이루었다(It is finished)"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셨습니다.

솔로몬 왕은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리며 40년을 왕으로 살았고, 3000년전의 세상에서 60년이라는 장수를 누렸지만  마지막에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Vanity of vanities, vanity of vanities; all is vanities)"라고 말하였습니다.


저도 80대 90대 나이가 되면 기억력이 분명 감퇴할 것입니다. 긴 세월을 살았지만 손에 잡히는 게 없으면, 기억에 남은 게 없으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Vanity of vanities, vanity of vanities; all is vanities)"라며 일생일장춘몽이라 말하게 될 겁니다.


빛을 보기 위해 눈이 있고 소리를 듣기 위해 귀가 있듯이
너희들은 시간을 느끼기 위해 가슴을 가지고 있단다.
가슴으로 느끼지 않은 시간은 모두 없어져 버리지.
 
하지만 슬프게도 이 세상에는 쿵쿵 뛰고 있는데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눈멀고, 귀먹은 가슴들이 수두룩하단다.

                                                      미하일 엔데의 소설 <모모>


컴퓨터에 매일의 일들을 적어서 산 흔적을 남긴 지가 20년이 되었습니다. '2004년 2월 20일 금요일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를 보다'와 같이 제목만 적힌 날도 있고 해외여행을 갔다 온 일정처럼 날짜별로 상세히 기록되고 호텔에 누워 기행문까지 기록된 날도 있습니다. '헛되고 헛되니 헛되고 헛되도다'라는 말을 하게 될까봐 미리 입막음을 하는 겁니다.


아침에 주차장을 가면 전날 주차해 둔 곳을 못 찾아서 헤매다가 주차된 곳을 찾으면 그제사 어제 주차하던 때 있었던 일들이 술술~ 기억이 다 납니다. 재미난 현상입니다. 젊은 시절 즐겨 듣던 음악을 오랜만에 듣노라면 어느덧 그 시절로 돌아가 있는 나를 발견하기도 합니다. 나의 일지에 적힌 내용들이 나의 추억들이 주차된 곳을 찾아주는 열쇠가 될 것이라 위안을 해봅니다. 그러하므로 오래 산다는 것숨 쉬는 연수의 길이가 아니라 설렘의 순간을 얼마나 많이 만나고 살았느냐, 그 설렘들이 추억으로 간직되어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젊은이 보다 노인들이 시간이 더 짧은 것은  신경세포의 정보 전달 속도 저하 때문이기도 하지만, 체력 때문이기도 합니다. 활동량이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설렘을 마다할 이유가 없는데 설렘을 주는 일을 만날 기회가 줄어듭니다. 아예 없을 가능성이 더 많습니다. 객쩍은 소리 하나 하자면요. 가요 <낭만에 대하여>에는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실연이라도 해보면 달콤할 것 같다'라고 토설하는 허스키한 최백호 가수의 목소리에는 잃어버린 것에 대한, 다시 못 올 것에 대한 절규가 얹혀 있습니다.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다는 절규입니다.  


'톰소여의 모험'의 저자 마크 트웨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즐길 힘이 있는데도 그럴 기회가 좀처럼 오지 않는 것이 인생의 전반이고, 후반에는 그럴 기회가 많은데도 즐길 힘이 없다."

괴테는 우리에게 교훈을 줍니다. "인생은 두 가지로 성립된다.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다. 할 수 있지만 하고 싶지 않다."


두 분의 말씀의 공통점은 표현은 다르나 내용은 너무나 똑같습니다. 나이 들어 늙어서 힘이 달리면 하고 싶어도 못하는 게 삶입니다. 우리들은 짧은 인생을 받은 것이 결코 아니며, 스스로 짧게 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얼굴에는 주름살이 잡혀도 마음에는 주름살이 없도록 살자고 다짐해 봅니다. 일상성이 적어질수록 인생의 충실감은 커질 테니까요. 길게 살려면 일상에서 벗어나려는 시도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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